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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livia Oct 29. 2020

갇힌 생각

돈키호테의 땅 카스티야-라 만차(Castilla-La Mancha)의 다섯 도시 중 두 번째로 작은 도시 쿠엥카. 이곳에서 스페인의 두 번째 삶을 시작했다. 여유롭지만 밝고 활기 넘치는 발렌시아와 달리 쿠엥카는 아기자기하고 적막한 도시다. 구시가지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을 정도로 아름다움을 자랑하지만 버스 노선은 네 개뿐에 지하철도 필요 없을 정도로 작고 심심한 곳.


나는 이 도시가 싫었다. 발렌시아의 넓은 바다도, 매일 산책 가던 공원도, 단골이 된 카페와 식당도 이곳엔 없었다. 활기차고 신나는 밤이 있던 발렌시아와 달리 쿠엥카의 밤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노는 것이 너무 좋았던 나는 이 도시가 끔찍하게 싫었다.


그럼에도 이곳에서 새 삶을 시작해야 한다. 나는 이미 이곳에 있는 학교에 입학했고 4년간 언론 공부를 하게 됐다. 내 속도 모른 채 너무도 평화로운 도시를 바라볼 때마다 원망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스페인 대학교 입학시험을 마친 후 나는 마드리드에 있는 대학교 5~6군데와 함께 카스티야 라 만차 대학교 쿠엥카 캠퍼스 언론과에 지원했다. 마드리드에 있는 학교에는 인터넷 접수 후 원본 서류를 한꺼번에 보내야 했다. 나는 원서 마감 며칠 전 우체국에서 우편을 보냈다. 하지만 내 서류는 누락됐다. 마드리드로 가는 길에 행방불명된 사실을 원서 마감 당일 날 알게 됐다. 우편물이 가끔 누락된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나에게 일어날 일이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서둘러 우체국으로 향해 가장 빠른우편을 다시 부쳤지만 소용없었다. 결국 바보 같은 이유로 스페인에 1년 반 동안 살면서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도시. 쿠엥카로 가게 됐다.


내가 원해서 온 곳이 아니었는데 심지어 이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숨통을 트이게 할 그 무엇도 없었다. 쿠엥카에 여행 온 친구들은 모두 평화롭고 예쁜 도시라고 했지만 나에겐 그저 재미없는 땅일 뿐이었다.


수업은 버거웠지만 만족스러웠다. 그리 좋은 학교도 아니고 스페인 내에서도 조금 촌스러운 곳이라 여겨지는 쿠엥카에서, 이곳 강단에 서는 교수들은 수준 높은 강의를 제공했다. 그렇다고 이 도시가 좋아지진 않았다. 작은 도시에서 졸업을 하고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막막했다. 


하지만 이곳 친구들은 나와 조금 다른 시선을 갖고 있었다.


항상 토론 수업에서 뚜렷한 주관을 말하고 과목마다 두루두루 높은 점수를 받는 미겔은 쿠엥카 출신이다. 그는 우리 학교에 입학하기 전, 마드리드에 위치한 명문 대학에 재학 중이었다. 그는 마드리드에 새로운 터전을 구하는 대신 1년 동안 쿠엥카에서 등하교했다. 기차를 타면 한 시간, 버스를 타면 두 시간이 걸리는 거리였다. 결국 미겔은 학교를 자퇴하고 고향에 있는 학교에 다시 입학했다. 그는 마드리드에 집을 구하지 않고 학교를 바꿨다. 그에겐 수도권 명문 대학을 다니는 것보다 가족과 고향에서 사는 것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또 다른 친구 훌리안은 마드리드 출신이다. 그 역시 마드리드 소재 대학교 2학년 재학 중에 수업 내용과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아 학교를 그만두고 쿠엥카로 왔다. 나와 동갑내기인 그가 학교를 2년이나 다니고 한 과감한 선택에 박수가 절로 나왔다. 나도 한국 대학교를 자퇴하고 새로운 시작을 했기 때문에 훌리안과 나의 상황은 똑같았다. 단지 내가 싫어하는 쿠엥카에 그가 스스로 왔다는 사실 때문에 대단하다 느껴졌다.


다니엘과 마리아는 K팝에 대한 과제를 하던 중 나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다. 그들은 인터뷰가 끝나고 왜 쿠엥카까지 왔느냐고 물었다. 구구절절 사연을 얘기할 시간이 없던 나는 그저 마드리드에 가려다 쿠엥카에 오게 됐다고 말했다. 다니엘은 발렌시아, 마리아는 마드리드 출신이었다. 공교롭게도 내가 살던 도시, 내가 살고 싶었던 도시에서 온 그들은 제3의 도시에 대한 극찬을 늘어놓았다. 그들은 “우리 학교 좋지? 학교가 작으니까 교수들이 학생 한 명 한 명에게 더 신경 쓸 수 있잖아. 특히 너한테 더 도움될 것 같아”라고 말했다.


집에 오는 내내 그 짧은 대화를 곱씹었다. 나는 너무 갇힌 생각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바뀐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자 이곳의 단점만 보려고 노력한 것 같았다. 충분한 장점이 있는 곳인데 그것을 애써 무시한 건 나였다. 


이곳엔 만족스러운 수업 내용을 자랑하는 좋은 교수들이 있다. 대부분의 교수는 수업에 들어오는 학생들의 이름과 얼굴을 전부 알고 있고, 그들의 세세한 특징까지 기억했다. 실기 수업에는 매번 모두에게 개인적인 피드백을 줬다. 수업 첫날, 눈에 띄는 검은 머리의 나를 보곤 수업이 끝난 후 조용히 불러내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하라고 일렀다. 학생의 의견을 진지하게 경청하고, 누군가 어린 행동을 보일 때면 차분히 문제의 핵심을 짚어줬다. 


학교를 나오면 청명한 하늘, 초록빛 강과 산, 불그스름한 노을이 집에 가는 길을 안내했다. 맑은 공기와 확 트인 하늘을 바라보며 집에 가는 것 역시 소소한 행복이 될 수 있는데. 나는 여태껏 그것을 무시하며 원망만 했다. 아무런 잘못 없이 아름답게 있기만 한 이 도시에게 미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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