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새드엔딩은 언제나 오래 남는 법이오.

by 오윤

기원전 5세기 후반 예루살렘은 페르시아 제국의 눈에 띄지도 않는 모퉁이에 있는 망가진 작은 도시였다. 새로운 종교적 전망보다 생존 투쟁이 전면에 부각되었다. 삶은 궁핍했고 불안했다. 그러면서 공동체는 점점 더 배타적이 되어간다. 마음의 벽들은 높아져갔고, 너와 나를 가르는 일들이 일상이 되었다. 이 국면에 변화를 주는 에이스가 필요했다. 이 에이스는 내부보다 외부에서 오기 마련이고, 그렇게 1차 귀향에 이어 바빌론으로부터 2차, 3차 귀향이 이루어졌다.

16 에스라.jpg 출처: https://maria.catholic.or.kr/

이 귀향과 재건을 주도한 인물은 사제 에스라, 총독 느헤미야였다. 처음, 꿈은 원대했고, 발걸음은 힘찼다.

“에스라 : 약속의 땅으로 씩씩하게 가자. 적의 말발굽에 짓밟힌 성전, 전쟁 포로가 된 치욕의 70년, 이제 해방이니 나팔을 불어라.. 무너진 성전 일으켜 세우게 양손에 광이와 망치를 들어라. 우상에 찌든 지난 날 갈아 엎고 새로운 성전 짓느라 가슴 두근거리네.”

“느헤미야 : 패망의 역사 되풀이하지 말자, 다시는 포로로 살지 말자, 한 손에는 칼, 한 손에는 연장, 성벽 재건을 위해 일어서 밤낮으로 공사하자. 폐허에 기적처럼 성벽이 생기네.” (김영진 외, 2020)


이 꿈과 발걸음이 목표로 하는 것은 성전과 성벽 건축이었다. 이들이 가시적으로 일으켜 세우려는 것은 성전과 성벽이었지만, 이를 통해 실질적으로 추켜 세우려했던 것은 무기력과 절망감에 빠진 사람들의 마음이었다. 쉽진 않았다. 내부적으로도, 외부적으로도 방해꾼들이 많았다. 외부의 방해꾼들이 가진 마음이 더 많이 가지려는 욕심이라면, 내부의 방해꾼들이 가진 마음은 이보다 더 복잡했다. 부의 편중과 공정하지 않은 일의 분배에 따른 분노,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데에 따른 시기심과 불안감 등등.


누군가는 성벽을 재건하려는 사람들의 수고를 폄하했고, 불가능한 일이라며 조롱하기도 했다. 누군가는 무장한 군인을 보내 그들이 쌓은 성벽을 무너뜨리기도 했다. 여기저기서 불만의 목소리도 들렸다. 지금 당장 먹을 것도 없는데, 한가하게 성전, 성벽이나 재건하면서 귀족과 관리층의 주머니만 배불린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새로운 꿈을 꾸고, 새로운 발걸음을 옮길 때 늘 이를 방해하는 방해꾼들이 있다.


이 방해꾼을 대하는 방편은 맞서거나, 무시하거나, 함께 하거나.

어떤 방식으로든 그 과정 속에 이야기도, 인간의 마음도 조금씩 변하게 되는데, 사실 무엇이 옮고 틀린지는 대부분의 이야기에서 모호하고,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쁜지 역시 인간의 인식이 가진 한계 안에서 오류투성이다.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어떤 선택을 해야만 하고, 그 선택에 최선을 다하고 책임을 지고, 교정해나갈 뿐이다. 당시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택한 전략은 대부분 맞서거나 무시하는 하는 방식이었다. 이 방식으로 얻어진 게 있다면 오롯한 자신들만의 정체성을 공고화해간 것, 그러나 이 방식으로 잃은 게 있다면 삶과 종교의 다양성, 개방성이었다. 성전을 건축하고 그곳에 들어갈 수 있는 자와 없는 자를 나누고, 성벽을 높이 높이 쌓는 선택에 대한 책임으로 이스라엘은 자기들의 성전과 성벽에 갇혀버린다. 그러면서 이야기는 보수화되고, 종교가 가진 매력 역시 쪼그라들었다. 매력적이지 않은 이야기 앞에서 사람들은 신에게, 종교지도자에게, 서로에게 냉담해진다.


16 말라기.jpg 출처: https://baptistmessage.com/malachi-old-sins/


왠지 지금 시대와 비슷하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 구약의 이야기도 마지막으로 향한다. 구약성서의 마지막은 말라기서다. 말라기는 스가랴와 학개를 이어 기원전 460년경에 활동한 예언자이자, 에스라, 느헤미아와 거의 동시대에 활동한 인물이다. 바빌론 포로생활로부터 귀환 후 성전도 짓고, 성벽도 쌓고, 다시 희망찬 공동체를 만들보겠다는 변화와 혁명의 열기는 방해꾼들의 방해공작으로 식어가고 피로와 권태에 자리를 내주던 시기였다. 말라기는 이 시대의 분위기를 이렇게 전한다. .


하나님께서 "나는 너희를 사랑한다" 하시면 사람들은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증거가 어디에 있습니까?"(1:2) 하고 대꾸한다. 제사장들을 향해 "너희가 바로 내 이름을 멸시하는 자들이다" 하면 그들은 "우리가 언제 주님의 이름을 멸시하였습니까?"(1:6) 하고 뻗댄다. 신에 대한 경외심은 무너졌고, 그러자 신도 인간을 버리기 시작했다. 오죽하면 "너희 가운데서라도 누가 성전 문을 닫아 걸어서, 너희들이 내 제단에 헛된 불을 피우지 못하게 하면 좋겠다! 나는 너희들이 싫다.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너희가 바치는 제물도 이제 나는 받지 않겠다"(1:10)고 이야기할까? (김기석, 2014, 1, 26)


현실과 종교에 대한 불만은 사람들의 마음에 부당함과 분노의 감정을 켜켜이 쟁겨놓기 시작한다. 당시 사람들이 보는 세상은 이랬다. "주님께서는 악한 일을 하는 사람도 모두 좋게 보신다. 주님께서 오히려 그런 사람들을 더 사랑하신다." "공의롭게 재판하시는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는가?"(2:17)


이런 분위기가 조성한 가장 큰 책임은 지도자들, 특히 종교 지도자들에게 있었다. 이들은 신의 목소리보다 자신의 목소리에 의존했고, 자기의 생각과 욕망에 집착했다. 더 이상 가난하고 병들고 아픈 길로 가려 하지 않았고, 기득권의 목소리, 주류의 이야기에 집착했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정치와 종교를 냉소하기 시작했고, 자신의 정파에 따라, 계급에 따라 나뉘기 시작했으며, 세상에는 거짓말과 사기와 착취와 타자에 대한 학대가 넘쳐나기 시작했다.


이렇게 구약은 끝난다.

새드엔딩.


16 sad.jpg


위대하고 고귀한 자여, 떠나라!에서 시작하여 모두가 타락한 새드엔딩으로의 귀결.


이는 400년 후 예수 탄생 후 다시 시작되는 이야기, 성서 시즌 2, 신약을 위한 떡밥일수도 있겠다.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구약이야말로 호모사피엔스가 만들어내는 이야기의 고갱이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인간의 삶이란 그때도 지금도 복잡하고 모순적이다. 때론 혼란과 절망의 시대를 버텨야 하고, 때론 영광과 감격의 시간을 거치기도 한다. 그 굽이굽이를 어떻게 넘어가야 할 것인가,이 질문이 들 때, 어쩌면 구약의 곳곳에서 건져낸 이야기들은 적지 않은 자극을 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 신, 삶과 관련된 수많은 스토리를 머금고 있는 구약성서를 끝까지 완주했다는데 아주 아주 큰 의미를 둔다. 이야기는 떠남에서 시작하여 새드엔딩으로 끝날 때, 가장 임팩트가 강한 듯 싶다. 뭔가 기분이 묘한 저녁이다.

"새드엔딩은 언제나 오래 남는 법이오."

구약 끝까지 간다 프로젝트는 이렇게 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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