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라스 이야기 12
새로 산 중고 모터바이크는 6개월이 채 되지 않아 문제가 생겼다. 정비소에 갈 돈이 없어 차일피일 미루었지만, 연료가 새는 걸 발견한 뒤론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소식을 들은 올리비에 아저씨는 마침 남는 모터바이크가 있다며, 그에게 선물을 주고 싶다고 했다. 니콜라스가 모터바이크를 꽤 잘 몬다는 걸 알고 있던 터였다. 신난 니콜라스는 아무 생각 없이 실반에게 전화해 이 기쁜 소식을 전했다. 리디아와 실반이 연락을 끊은 지 5년도 더 되었을 때였다.
실반은 받지 말라고 했다. 대신 자기가 아는 정비소가 있으니 거기에서 모터바이크를 고쳐주겠다고 했다. 실반은 니콜라스의 새아빠 격인 올리비에가 자신이 할 수 없는 선물을 한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니콜라스는 실반의 반응이 너무나 실망스러웠지만 그의 기분을 해치고 싶지도 않아, 알았다고 했다.
고장 난 모터바이크를 실반에게 건네고 몇 주가 지났다. 실반을 찾아온 니콜라스에게 그는 서류를 하나 건네며, 모터바이크를 받고 싶으면 먼저 여기에 엄마 싸인을 받아오라고 했다. 집에 가는 길에 봉투를 열었다. 이혼 서류였다. 손이 떨렸다. 하다 하다 이혼 서류까지 주다니··· 이제 기억 속의 엄마 아빠는 정말로 남남이 되겠구나. 그리고 그걸 내 손으로 하고 있구나··· 눈물이 났다. 지금껏 비둘기 노릇을 하며 살아온 그이지만 이번만은 차마 하지 못할 것 같았다.
그날 밤, 니콜라스는 어렵사리 리디아에게 서류를 내밀었다. 봉투를 열어본 리디아는 차갑게 자신의 의견은 변호사가 대변하니 변호사와 직접 얘기하라고 ‘전하라’고 했다. 니콜라스는 마음이 찢어질 것 같았다. 다시 실반에게 전화를 걸었다. 실반은 싸인이 없으면 정비소에 데려가지 않을 거라고 했다. 그렇게 그들의 이혼 서류는 묶였고 니콜라스의 단 하나의 해방구이던 모터바이크도 정비소에 묶였다.
세상의 어떤 부모가 자식에게 이혼 도장을 찍어오라고 시킬 수 있을까. 지긋지긋했다. 니콜라스는 두 사람에게 정을 뗐다. 부모로서 정이 떨어진 지는 오래고, 이번엔 사람으로서 정이 떨어졌다. 어릴 적부터 간직해오던 마음속 영웅 실반도 버렸다. 그들은 부모가 되어서는 안 됐다.
그즈음 리디아는 부동산 중개업을 그만뒀다. 인센티브로 월급을 대신하겠다는 회사의 새 방침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다. 일을 그만두었지만 프랑스의 잘된 실업급여 제도로 매달 월급의 80퍼센트를 받았다. 일을 안 해도 돈이 들어오니 리디아는 삶의 의욕을 잃었다. 그녀는 집 밖으로 나오지 않았고 미국 드라마를 하염없이 보았다. 마치 실반이 돈을 벌어다주던 때처럼. 밥은 배가 고플 때만 먹었다. 담배는 하루 한 갑, 와인은 하루 한 병 이상이 넘어갔다. 올리비에도 그런 그녀를 점점 버거워하기 시작했다.
직업학교 1학년이 끝나가던 여름 퇴근길이었다. 리디아에게 전화가 왔다. 그녀는 혀 꼬인 소리로 올리비에에게 전화해서 이제 다 끝났다고 ‘전하라’고 했다. 니콜라스는 이제 친아빠를 넘어 새아빠에게도 비둘기 역할을 해야 했다. 이혼 서류의 기억이 아직 생생할 무렵이었다. 리디아는 수화기 너머로 말을 이었지만 알아들을 수 없었다. 니콜라스는 그녀의 상태가 심각함을 깨달았다. 올리비에에게 전화해 그와 함께 집으로 갔다.
리디아는 완전히 취해 바닥에 흐트러져 있었다. 집안에 토한 흔적이 있었고 오븐은 발로 차서 망가져 있었다. 리디아는 그들을 보자 히스테릭하게 소리를 질렀다. “다 끝이야, 다 끝이야!” 그녀의 몸 안에는 분노가 있었다. 남자 둘이 겨우 제지할 정도였다. 올리비에가 그녀를 욕실로 가 씻겼다. 술을 깨우고 상황이 진정됐다 생각한 둘은 집을 나섰다. 리디아가 따라 나와 주변의 차를 부술 듯이 내리치기 시작했다.
니콜라스는 도저히 엄마와 지낼 수 없겠다고 생각했다. 올리비에 아저씨는 혹시, 그만 괜찮다면 자기 집에서 지내도 된다고 했다. 니콜라스는 싫다고 대답했다. 그는 “미안하다” 하고 돌아섰다. 그 후로 다시는 올리비에 아저씨를 볼 수 없었다.
모터바이크에 시동을 걸었다. 그러나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하염없이 눈물만 흘렀다. 여름밤 가로등 아래 한참을 앉아 있었다. 눈물이 마를 때까지.
정신을 차린 니콜라스는 칸에 있는 할머니 레이몽드의 집으로 갔다. 레이몽드는 은퇴해 집에서 쉬던 참이었다. 그녀는 이제는 자기보다 덩치가 커진 손자를 안고 다독였다. “내가 미안하다. 미안하다.”
당분간 레이몽드의 좁은 원룸에서 지내기로 했다. 손자의 해진 청바지를 본 레이몽드는 칸 시내로 나가 유행하는 청바지를 사주었다. 나이키 운동화와 가방도 사주었다. 노인 연금으로 살던 그녀였지만, 손자가 엄마 없는 아이처럼 허름하게 다니게 둘 수는 없었다. 니콜라스는 2주 뒤 리디아의 집으로 짐을 가지러 갔다. 한 번 더 술을 마시면 다신 아들 얼굴을 못 보게 될 거라고 엄포를 놓고 리디아를 떠났다.
니콜라스의 모터바이크는 아직도 정비소에 있었다. 실반은 여전히 이혼 서류 없이는 모터바이크를 주지 않겠다고 했다. 정비소 위치를 알려주지 않아서 찾으러 갈 수도 없었다. 그의 유치한 방식에 치가 떨렸다. 아버지란 사람이 아들한테 지금 이게 뭐하는 짓인가. 니콜라스는 전화를 끊은 뒤 그의 번호를 지웠다. 더 이상 그와 연락할 가치가 없었다.
사정을 들은 레이몽드는 며칠 뒤 니콜라스에게 2,400유로짜리 새 모터바이크를 사주었다. 아프릴리아(Aprilia) 사의 50cc 모델이었다. 중고만 타던 니콜라스가 처음으로 새 모터바이크를 갖게 되었다. 사실 그 돈은 레이몽드가 평생을 조금씩 모아 온 비상금이었다. 니콜라스는 레이몽드에게 1년에 걸쳐 그 돈을 갚겠다고 약속했다. 월급 720유로에서 100유로씩 떼어 갚았다. 일 년 뒤 레이몽드는 이쯤 하면 되었다고 했다. 두 사람이 반씩 모아 산 모터바이크로 니콜라스는 직장과 학교를 오갔다.
니콜라스는 레이몽드와 살며 생애 처음으로 안정감을 느꼈다. 비록 그의 방도, 넓은 거실도 없는 집이었지만, 할머니의 집에는 삶이 있었다. 발코니에는 철마다 꽃이 만발했고 가구는 정돈돼 있었다. 그의 짧은 평생을 따라다니던 술 냄새와 담배 냄새, 히스테리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