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잘 써지는 자리가 있다.
청담역과 강남구청역 사이에 있는 작은 공원, 나뭇잎 사이로 햇살이 조각조각 부서져 살포시 내려앉은 벤치라던지, 프랜차이즈 카페들이 가득한 대로변을 피해 골목골목을 전전하다가 우연히 마주친 이름 모를 작은 카페의 구석진 자리 같은 그런 곳. 그리고 그런 운치와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 보이지만 나에게 가장 많은 영감을 주는 곳은 바로 이곳. 지하철 강남구청역의 지하 광장이다.
강남구청역 지하에는 넓은 광장이 있다. 사방으로는 지상으로 향하는 계단과 에스컬레이터 들이 쉴 새 없이 사람들의 흔적을 만들어내고 있고, 광장의 가운데 너머로는 분당선 플랫폼으로 내려가는 길이 폭포처럼 쏟아진다. 그 반대편으로는 제법 큰 규모의 지하철 화장실이 자리하고 있는데, 나는 분주하지 않은 그 화장실이 좋다. 그리고 그 광장의 정 가운데, 앞서 말한 모든 것들을 조망할 수 있는 중앙에는 원형의 인공정원과 함께 그 주위를 빙 둘러선 작은 의자들이 있다. 나는 견고한 이 의자들도 좋다. 어느 교회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그 교회에서 돈을 대서 만든 모양이었다. 덕분인지 크리스마스 때 이 인공정원은 각종 크리스마스 장식들로 번쩍거리기도 한다. 그 풍경도 아름답다.
이곳에 앉아 있으면 바쁘게 오고 가는 사람들의 풍경을 구경할 수 있다. 적당한 소음과 적당한 속도로 변화하는 풍경 속에 나를 녹이고 있노라면 저절로 시가 떠오른다. 어차피 시라는 것은 결국 세상 속에 녹아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 아니던가. 자연스러운 일이다. 풍경 속에 녹아내린 내가, 눈앞에 녹아 흐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방울방울 묻어나는 잉크에 담아 종이에 사각사각 새겨놓는다.
사각사각. 이 소리가 나는 좋다.
산림훼손을 막기 위해 사탕수수 찌꺼기로 만든 재생종이로 만들어진 작은 수첩 위에 나만이 알아볼 수 있는 글씨로 은밀한 시구가 채워진다. 좋은 종이에는 그 종이에 어울리는 필기구가 있다. 비싸지는 않지만 따뜻한 나무소재의 몸통을 가지고 있는 파버카스텔 온도로 만년필. 거기에 세계 제일의 만년필 전문가 박종진 만년필연구소 소장님이 직접 손봐준 펜닙은 막힘없이 잉크를 흘려준다. 요즈음의 시간과는 어울리지 않는 아날로그의 향연. 나는 이들이 만들어 내는 풍취를 사랑한다.
딸아이는 이런 나를 답답해한다.
나의 졸작들이 모인 수첩이 늘어가는 것을 보면서, 이렇게 아깝게 종이에 쓰고 말지 말고 아빠도 인터넷 공간에 글을 쓰면 어떠냐고 한다. 얼마 전에는 브런치인지 뭔지 하는 곳도 알려주면서 그곳에 한편씩 글을 써서 많이 모이면 책으로 내보면 어떠냐고 했다. 나도 내 졸작들을 여러 사람들에게 공개하고 평가를 받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다. 하지만 이것은 내가 끝까지 고수하고픈 나의 철학이고 나의 낭만이다.
보이기 위함도 아니고, 인정받기 위함도 아니다.
그냥 나는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향유하며 그 순간을 오롯이 누리고 싶다.
그것이 나의 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