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10시 33분.
평소라면 회사에 있을 시간이었다.
그때그때 즉흥적으로 시키는 일들만 해오던 게 익숙해서, 지금 회사에 있었다면 무슨 일을 하고 있었을지 상상이 안 갔다. 5년을 다녔지만, 나는 아직도 그 회사가 무슨 회사였는지 잘 모르겠다.
이제는 '전'직장이 되어버린 나의 회사는 이제 곧 문을 닫는다.
사실 지금까지 버텨온 것도 신기한 회사였는데, 막상 진짜로 문을 닫고 직원들이 떠나야 한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았다. 다른 직원들과 함께 2시간 동안 점심을 먹으며 이 회사 쭉 다니다가 은퇴하면 좋겠다는 말도 했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렇게 안일하고 태평한 회사였으니 이렇게 쉽게 망하는구나 싶어서 씁쓸해졌다.
전문대를 졸업하고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던 차에, 아는 형의 소개로 들어간 회사였다.
회사 이름이 '무슨무슨 인터내셔널'이길래 무역회사인 줄 알았는데, 그냥 이것저것 인터내셔널한 잡일은 다 하는 곳이었다. 공장에서 물건이 들어오면 창고에 차곡차곡 옮기고, 다음 날에는 이과장님이 뽑아준 납품리스트를 챙겨서 1톤 탑차에 물건을 싣고 거래처를 다니며 납품을 했다. 대표님의 조카라는 이과장님은 엑셀에 서툴러서 표 칸 안에 있는 글씨 일부가 잘린 채 리스트를 출력하는 일이 빈번했다. 엉뚱한 주소로 가서 헤매는 일이 다반사여서 결국 내가 직접 리스트를 만들고 뽑는 일을 하기도 했다. 셀 끝에서 더블클릭만 하면 가려진 글자가 다 보이는데 몰라서 안 한 건지 귀찮아서 안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덕분에 나는 엑셀을 배웠다.
어느 날은 제품 상자에 인쇄된 내용을 바꿔야 한다며 온 직원이 달라붙어 몇천 장이 넘는 스티커를 붙이기도 했다. 대표님이 야심 차게 뽑은 디자이너 미영씨는 입사하고 4일 동안 스티커만 붙이다가 내가 이런 거 하려고 이 회사 입사한 게 아니라며 전화로 퇴사를 통보했다. 그리고 대표님은 나에게 미영씨가 보던 일러스트레이터라는 디자인 프로그램 책을 주면서, 다음부터는 내가 공부해서 이 스티커를 만들라고 했다. 난생처음 보는 프로그램이라 막막했지만 열심히 공부해서 겨우 A4용지에 맞춰서 글자와 도형들을 프린트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곧 그 프로그램은 무료사용 기간이 지났다며 더 이상 사용할 수 없었고, 대표님은 그냥 그만하라고 했다. 우리 회사에 언제부터 디자이너가 있었냐며.
간혹 멋모르고 신입직원이 들어오기도 했다. 언젠가는 대표님이 무슨 자신감이었는지 직원들을 연달아 3명을 뽑은 적이 있었다. 일 할 사람이 많아지면 그만큼 회사가 커진다면서 신나 하던 대표님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 3명 중 가장 오래 근무한 형식이는 어떻게든 퇴직금을 받고야 말겠다며 1년째 되는 날 출근하자마자 퇴사를 통보했고, 회사 단톡방에 유명한 퇴사짤을 남기고 방을 나가버렸다. '함께해서 더러웠고 다시는 만나지 말자'였던가? 조립비를 아끼라고 해서 내가 직접 부품을 사다가 조립해 준 컴퓨터들은 뭘 잘 못 조립했는지 형식이가 퇴사하는 그날까지 덜덜거리는 시끄러운 팬 소음을 내고 있었다. 윈도우를 왜 돈 내고 사야 하는지 이해를 못 하는 대표님을 설득하다가 지쳐 불법으로 윈도우를 다운 받아서 깔아주기도 했었다.
정말 별 일을 다했다.
덕분에 나는 무슨 일이든지 다 할 수 있는 만능이 되었지만, 이력서에는 그런 걸 쓸 수가 없었다.
한 회사에서 5년이나 있었는데, 그 한 줄 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쓸 말이 없었다.
5년을 버린 느낌이 들었다.
오늘은 실업급여를 신청하기 위해 고용센터에 가고 있다.
미리 인터넷으로 충분히 알아봐서 막막하지는 않았지만 괜히 긴장이 된다.
내가 준비할 것은 다했고, 회사에서 제출해야 하는 '이직확인서'라는 서류도 대표님이 어떻게 하는지 모른다고 해서 내가 직접 가서 처리해 주었다. 나도 나지만, 이 대표님은 앞으로 어떻게 살까?
누가 누구를 걱정하는지 모르겠다.
실업급여를 얼마나 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전 회사에서 월급을 많이 받지도 않았으니, 실업급여도 많지 않을 거였다.
차라리 아르바이트라도 할 걸 그랬나 싶다가도 나라에서 받을 수 있는 건 받아야지 싶었다.
막막하고 답답했다.
매년 특별히 쓸 일도 없어서 휴가도 별로 쓴 적도 없는데, 이참에 실컷 쉬면서 앞으로 뭘 해야 할지 생각을 해보기로 했다.
그리고 내가 진짜로 좋아하고 잘하는 일이 뭔지 찾아보고 싶다.
내가 뭘 좋아하고 뭘 잘할 수 있을까?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