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패다.
언제부터 미행을 당한 건지 모르겠다.
이렇게 사람이 많은 지하철을 탈 때는 조금 더 신중했어야 했다.
하지만 후회해 봤자 소용없다. 어서 방법을 찾아야 한다.
놈의 시선을 느낀 것은 채 5분이 되지 않았다.
처음에는 은근히 자리 양보를 바라며 눈치를 주는 사람이거나
음흉한 시선으로 내 몸을 더듬는 변태쯤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뭔가 달랐다.
날카로운 시선으로 주변을 뒤져가며 나를 발견했고
나를 발견한 후에는 눈빛으로 꼼짝없이 나를 묶어두었다.
내가 조금이라도 허튼짓을 하면 놈은 바로 대응해 올 것이다.
이미 눈에 띄지 않는 무기를 숨기고 내 가까운 곳까지 왔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금은 내 몸의 구석구석을 훑으며
한 번의 손짓으로 제압할 수 있는 급소를 찾고 있음이 분명했다.
숨이 턱턱 막히고 손에 땀이 쥐어진다.
도대체 어디서 갑자기 나타난 걸까?
놈들에게 이런 실력자가 있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다.
도대체 놈의 목적은 뭘까?
지난달 파주에서의 작업 이후로 용병을 구한 걸까?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어떻게 나를 찾아낸 거지?
다음 역은 다행히 사람이 많이 타고 내리는 선릉역이다.
우선 피하고 보자.
나는 부끄러움이 많은 탓에 맨날 아저씨만 그렸다.
아저씨들은 대체로 내가 쳐다보든 말든 신경을 안 쓰기도 하고,
평범해 보이지만 다들 각자의 개성이 뚜렷해서 그릴 맛이 나는 모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은 이 아가씨가 눈에 띄었다.
잘 그릴 자신은 없었지만, 평소대로 의식하지 않고
눈으로 보이는 대로 손으로 옮기면 되는 거였다.
하지만 내가 그리고 있다는 사실을 눈에 띄지 않아야 끝까지 그릴 수 있었기에
나는 조심스레 눈길을 옮겨가며 그녀의 외곽선을 더듬었다.
오랜만에 꺼내든 붓펜은 아직 세밀함을 잃지 않았고,
새로 산 스케치북은 붓펜의 먹을 적당히 받아주었다.
그리고 가장 다행인 것은, 골똘히 생각에 잠겨 나를 전혀 의식하지 않는 모델 아가씨.
가방의 호피무늬까지 새겨 넣는 동안, 나를 위해 그 자리를 지켜주었다.
고맙습니다. 아가씨.
선릉역이네. 저는 이번에 내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