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젊은 디자이너들은 융통성이 없다.
‘모던하고 화려하면서 장식이 좀 있고 심플한 디자인’을 원한다는 클라이언트의 말이 이해가 안 가나? 나는 그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게 더 이해가 안 간다.
디자이너는 클라이언트의 마음을 읽어야 한다.
내가 클라이언트가 된 것처럼 클라이언트의 의도를 깊이 파악하고 차마 말로는 표현되지 않는 심연의 그 무언가를 찾아서 머리끄덩이를 잡고 끌어올려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클라이언트의 눈앞에 패대기를 치며 꺼내주어야 한다.
여기, 대령했습니다. 하는 여유 있는 미소는 디자이너의 기본 소양이다.
그런 자세를 가지고 있다면 클라이언트의 요구사항이 아무리 애매모호하고 주어부터 서술어까지 모순으로 범벅이 되어 있더라도 답을 찾아낼 수 있다. 그것이 바로 프로 디자이너다.
함께 미팅을 갔던 최 과장은 입이 댓 발이 나와서 용가리 불 뿜듯 한숨을 뿜어대고 있다.
이 프로젝트를 담당해서 진행을 해야 하는데 도무지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 답이 안 나오는 모양이다.
이럴 때는 옆에 있는 나에게 방법을 물어보면 내가 정말 친절하고 나이스하게 도와줄 텐데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건지, 나를 못 믿겠는 건지 나에게는 어떤 조언도 구하지 않는다.
한편으로는 안쓰럽기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고소하기도 하다.
나를 시대에 뒤떨어진 꼰대 취급을 하며 은근히 무시하던 최 과장이다.
피그마인지 피그돼지새낀지 프로그램을 모를 수도 있지, 지는 퓨츄라 서체를 누가 만들었는지도 모르는 주제에,
“전무님께는 따로 페이퍼로 보고드려야겠네요. 피그마를 쓰실 줄 알면 진행상황 바로 공유드릴 수 있는데… 좀 번거롭지만 할 수 없죠.”
썩을 놈. 내가 지를 얼마나 물고 빨고 업어 키워서 과장까지 만들어줬는데, 이제 짬밥 좀 삼시세끼로 처먹었다고 나를 그렇게 무시하고 쫑크를 줘? 최 과장과 한패거리인 젊은 사원들의 실룩거리던 입술이 생각난다.
저번에도 시안이 잘 풀리지 않아서 헤매고 있길래, 얀치홀트에게 영감을 받아 그리드를 과감하게 살린 시안을 만들어준 적이 있다. 그 클라이언트는 이렇게 뭔가 있어 보이는 정통 스위스 스타일을 좋아하니 그냥 참고만 하라는 의미였다. 그 완벽한 시안을 보고 흔들리던 최 과장의 눈빛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지가 얀치홀트를 알아?
어쨌든, 무시 좀 당했다고 해서 악감정이 남아 있을 거라는 건 경기도 오산비행장이다.
나는 공사구분이 확실한 깨어있는 관리자이다.
부하직원이 위기에 처하면 당연히 도움을 주어야 하는 것이 관리자의 몫.
나는 오늘의 미팅내용을 나만의 방식으로 정리하며 머릿속으로 프로토타입을 만든다.
오늘도 나의 머릿속에서는 완벽한 디자인 시안이 또 하나 완성되었다.
반고흐가 정신이 한 바퀴 다시 돌아서 제정신으로 돌아올 만큼 아름다운 색감.
다빈치가 보고 머리를 쥐어뜯으며 울고 갈 황금비율의 레이아웃.
21세기 디자인사 표지에 쓰일 법한 완벽한 타이포그라피까지.
회사에 돌아가서 이것을 빨리 눈앞으로 꺼내놓고 싶은데
혹시라도 야근을 하는 직원들이 있으면 불편해할 테니 가지도 못하겠다.
이것들 집에 안 가고 야근수당만 축내고 있는 건 아니겠지?
아, 나의 이 열정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나는 아직 한창이고 누구보다도 더 잘할 수 있는데.
왜 나에게 적성에도 안 맞는 관리자의 지위가 주어진 걸까.
나도 다시 실무에서 디자인을 하고 싶다.
야근을 하는 젊은 직원들의 틈에서 다시 함께 논쟁하고 협업하며 빛나는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싶다.
뻥이야.
빨리 집에 가서 야구나 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