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3. 13. 1:05)
아무의미없이
모으던 약통이 있었다.
그리고
한창 해외여행을 다니면서
가볍게 사오기 만만했던 찻잎들.
그 중에
외국어를 못읽어서 잘못 사버린
대용량 찻잎이 큰 봉지에 담겨진 채
찬장에 찬밥신세처럼 잊혀져가고 있었는데.
최근 커피 대신 홍차를 마시다가
잊혀지고있던 찻잎을 다시 꺼내보게 되었다.
당시엔 내 입맛이 그다지 각종 홍차에 별로 익숙하지 않아서 맛이 없기도 했고
무엇보다 큰 봉지에 담겨진 찻잎을
작은 차 필터에 옮겨담는 것도 일이고
이래저래 번거롭기만 해서
더 손이 안갔던 것이 생각났다.
그러다 약통이 떠올랐다.
약을 담았었기 때문에
약통은 찻잎을 담기에 매우 적절하게도
청결했다.
심지어 실리카겔도 하나씩 꼭 꼭 들어있었다.
그리하여 볼품없는 비닐봉지에 담긴 찻잎들을
그간 꽤 많이 모아졌던 약통에 옮겨담게 되었다.
약통이 찻잎을 담는 용도로 '발견'되지 않았다면
그대로 어느순간 놓아둘 공간이 부족해져서
쓰레기통에 버려졌을 운명이었을 것이다.
찻잎역시 그 부담스러운 큰 봉지로
매번 찻잎가루가 떨어질까 조심스러워하면서
필터백에 옮겨담는 일이 번거로워
멀리하게되다가 찬장에서 잊혀져갔을 터였다.
빈 약통과 찻잎의 만남.
이보다 더 완벽하게 윈윈인 만남이 있을까.
정말 아름다운 관계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에게 너무도 완벽하게 서로가 필요한 관계.
약통의 용도를 발견한 것이
나는 너무 기뻤다.
이렇게 용도와 쓰임 그리고 있을 자리 를 정하는 것은
마치 이름을 지어 존재를 인정해주는 것만같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부여해주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나는
약통과 찻잎같은 관계라는,
그 어떤 이상적인 관계에 대한
조금 구체적인 모습을
그려볼 수가 있게 된 것 같다.
내가 그에게 가서 꽃이 되었다
뭐 이런 시가 생각나는데
의미가 있는 관계란
서로에게 특별하고도 유일한
이름이 되어주는 관계가
정말 맞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