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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시간. 너. 30화

이상적인 관계 : 찻잎과 약통

by 지은

(2021. 3. 13. 1:05)

아무의미없이

모으던 약통이 있었다.


그리고

한창 해외여행을 다니면서

가볍게 사오기 만만했던 찻잎들.


그 중에

외국어를 못읽어서 잘못 사버린

대용량 찻잎이 큰 봉지에 담겨진 채

찬장에 찬밥신세처럼 잊혀져가고 있었는데.


최근 커피 대신 홍차를 마시다가

잊혀지고있던 찻잎을 다시 꺼내보게 되었다.


당시엔 내 입맛이 그다지 각종 홍차에 별로 익숙하지 않아서 맛이 없기도 했고

무엇보다 큰 봉지에 담겨진 찻잎을

작은 차 필터에 옮겨담는 것도 일이고

이래저래 번거롭기만 해서

더 손이 안갔던 것이 생각났다.


그러다 약통이 떠올랐다.


약을 담았었기 때문에

약통은 찻잎을 담기에 매우 적절하게도

청결했다.

심지어 실리카겔도 하나씩 꼭 꼭 들어있었다.


그리하여 볼품없는 비닐봉지에 담긴 찻잎들을

그간 꽤 많이 모아졌던 약통에 옮겨담게 되었다.


약통이 찻잎을 담는 용도로 '발견'되지 않았다면

그대로 어느순간 놓아둘 공간이 부족해져서

쓰레기통에 버려졌을 운명이었을 것이다.


찻잎역시 그 부담스러운 큰 봉지로

매번 찻잎가루가 떨어질까 조심스러워하면서

필터백에 옮겨담는 일이 번거로워

멀리하게되다가 찬장에서 잊혀져갔을 터였다.


빈 약통과 찻잎의 만남.

이보다 더 완벽하게 윈윈인 만남이 있을까.


정말 아름다운 관계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에게 너무도 완벽하게 서로가 필요한 관계.


약통의 용도를 발견한 것이

나는 너무 기뻤다.


이렇게 용도와 쓰임 그리고 있을 자리 를 정하는 것은

마치 이름을 지어 존재를 인정해주는 것만같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부여해주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나는

약통과 찻잎같은 관계라는,

그 어떤 이상적인 관계에 대한

조금 구체적인 모습을

그려볼 수가 있게 된 것 같다.


내가 그에게 가서 꽃이 되었다

뭐 이런 시가 생각나는데


의미가 있는 관계란

서로에게 특별하고도 유일한

이름이 되어주는 관계가

정말 맞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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