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훈정 감독. 낙원의 밤
사는 건 클리셰로 가득하다. 처음 살아보는 당사자에겐 모든 경험과 자극이 새롭겠지만, 실은 타인과 이웃과 지인과 조상과 조상의 조상들이 대부분 겪었던 (흔하디 흔한) 경험과 자극이다. 생각과 느낌 또한 그럴 것이다. 해석을 달리할 수는 있겠지만 인간과 삶의 원형은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좀처럼 차별화된 진보를 이루지 못한다. 나의 삶, 오직 나만의 것, 남과 다른 것, 유일해야 하는. 그래서 더욱 특별하고 소중한 어쩌구... 다치지 않으려 끌어안고 '다름'을 주장하고 싶을 수도 있겠지만 시간대와 공간 같은 외부 요인이 다를 뿐 (물론 이것 역시 분류하면 죄다 같거나 비슷하겠지만) -최초의 인류가 증언하지 않는 이상- 다 익숙하고 진부한 것들 뿐이다. 빗길에 교통사고 나면 죽고 칼 한번 또는 여러 번 맞으면 죽고 총 맞으면 죽고 현대 의학으로 고치기 어려운 병에 걸리면 죽는다. 다른 짐승들보다 뇌를 좀 더 가동할 수 있다는 자만에서 비롯되었는지 혼자라도 살아남으려고 눈깔이 돌았는지 어떤 부류의 인간은 이 클리셰에서 벗어나려고 규칙을 깨는 길을 선택한다.
애초 무리의 생존 방식으로 본능적으로 채택되었던 신뢰는 불안한 규칙이었다. 낙원의 밤에서는 면밀한 계획을 지닌 소수에 의해 무참히 깨어진다. 추구하는 결과는 극소수의 생존이다. 나머지는 죽는다. 한때 목숨을 걸고 신뢰하던 이들에 의해 목이 달아난다. 이런 배신으로 죽는 것도 클리셰의 일부일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깨진 신뢰로 고통받는 타인의 파멸 과정을 지켜보는 일은 그리 진부하지 않게 느껴진다. 사람의 사고방식이란 게 다른 사람 때리고 죽이는 일로 밥 먹고 살고 있으면서도 내가 피해자가 되는 날은 좀 더 더디게 올 거라고 한쪽 눈을 감기 마련이다. 순수한 의리, 맹목적인 충성, 감동적인 희생... 이런 것들이 결국 나를 나답게 하고 우리와 모두를 지킬 거라고 자기 최면에 빠진다. 칼날이 숨통을 쑤시고 근육을 찢고 핏물이 멈추지 않으면 그제야 진짜 현실을 직시하게 된다. 너무 늦었지. 낙원의 밤에서 상세하게 묘사하는 배신은 베프와 전 애인이 사귄다니 아이고 원통해라 정도의 레벨이 아니다. 가장 믿었던 자에 의해 유일한 가족이 죽고 자신을 믿는 타인을 자기 손으로 죽이게 하며 자길 지키려 했던 지인도 죽이고 끝내 자기도 죽이는 배신이다. 한 인간의 세계를 지상에서 도려내는 행위의 총합이다.
이런 배신의 배신의 배신을 당하는 자가 온몸을 도륙당하며 피를 뒤집어쓰는 과정은 -대리 살인 쾌감 경험으로서- 조금 새로운 클리셰다. 경쟁 업체 직원을 죽도록 패고 난 후 귀 자르고 시발 시발 거리는 백정이라도 '나는 원칙을 지킬 줄 아는 악당'이라는 걸 가열 차게 주장하는 모습은 조금 새로운 클리셰다. 혼자 살려고 의리고 나발이고 자기 때문에 죽으려는 애를 가족 죽이고 친구 죽이고 다 죽이는 악인에게 진정성을 가미하려는 시도들은 조금 새로운 클리셰다. 그러나 새로운 클리셰도 결국 클리셰다. 냉담한 반응을 깰 수 있는 건 고립된 시공간과 한없이 정형화된 (기존 영화들에서 수없이 반복된 설정의) 틀 안에서 얼마나 설득력 있는 각본과 연기, 연출과 편집, 음악과 미술이 펼쳐지는가 일 것이다. 낙원의 밤은 시퍼런 제주 밤바다의 물살 속에서 허우적거리다가 차승원이라는 구명조끼를 가까스로 장착한다. 질감 없는 로맨스 속에서 유일한 새로움이었다.
브런치 넷플릭스 스토리텔러로 선정되어 넷플릭스 멤버십과 소정의 상품을 지원받았으며, 넷플릭스 콘텐츠를 직접 감상 후 느낀 점을 발행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