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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승권 Sep 19. 2021

랑종, 귀신 VS 무당

반종 피산다나쿤 감독. 나홍진 제작. 랑종

세상은 단 하나가 아니다. 국가나 인종, 언어와 자연환경의 차이 정도로 나누는 게 보통이지만 적용하는 기준에 따라 세상의 형태도 나뉜다. 그 기준이란 때로는 가시적이지 않다. 직간접적으로 보거나 들었다고 믿은 것들이 전해 내려오고 다수와 집단으로 확장되면 믿음은 힘을 얻는다. 이것을 내가 보고 들었으니 너희도 이걸 믿어야 한다는 주장이 집단을 결속시키는데 영향을 미치고 개인의 불안한 심연에 내려앉게 되면 믿음은 더 이상 호불호가 중요하지 않게 된다. 믿느냐 마느냐에서 믿지 않으면 안 되는 것으로 존속하게 된다. 이 뿌리는 침묵으로 깊게 유지된다. 의심을 발설하지 않는다. 받아들이고 따르고 동의를 표할 뿐, 일정한 시간 동안 질서의 일부가 된 특정 믿음을 거스르지 않게 된다. 먹고사는 게 지치고 힘겨워 굳이 따지지 않는다. 순응할 뿐이다. 불확실성과 예측불가의 특성을 지닌 이런 믿음이 세상을 어지럽게 구분하는 기준의 일부라고 여기는 편이다. 잘 알려진 역사와 거대 세력을 지닌 대형 종교만이 아니다. 권력을 지닌 보이지 않는 존재는 수많은 곳에 있다. 인간이 아닌 존재, 신 또는 귀신이라 불리는 존재. 믿음의 시간과 의지의 크기에 따라 보이지 않는 존재가 지닌 권력은 비례하게 된다. 얼마나 그 권력에 일상을 기대는가, 얼마나 의식하며 지내는가, 얼마나 두려워하고 있는가. 얼마나 섬기고 따르고 있는가, 얼마나 정성을 다해 입과 심장으로 부르고 있는가. 자유의지로 무신론자를 택한 사람들이 들으면 의아하거나 비웃을 일이다. 하지만 그런 자유가 애초 주어지지 않는 환경도 있다. 님(싸와니 우툼마)은 타의로 무당(랑종)이 되어야 했다. 아멘과 할렐루야가 거의 들리지 않는 곳에서 님은 신과 인간 사이에서 귀신들과 싸우고 있었다. 귀신 들린 조카, 밍(나릴야 군몽콘켓)의 몸속에 온갖 귀신과 저주가 서려 있다고 믿고 있었다. 다른 나라였다면 구급차에 태워 정신병동 시설에 집어넣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님과 밍이 사는 곳은 귀신의 존재와 영향을 믿고 있었고 사악한 의도를 지닌 귀신이 표적 삼은 인간을 죽을 때까지 괴롭힌다고 믿고 있었다. 이 믿음의 결계 안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었다. 먼저 죽거나 나중에 죽거나, 이 둘 중 하나에 이르는 고통의 과정을 피울음과 비명, 무지와 공포 속에서 감내하는 일뿐이었다. 귀신의 존재를 믿기에 귀신은 그들 사이에서 존재할 수 있었다.


(이하 스포일러)


그 믿음들 사이에서 깔깔거리며 모든 인간을 죽일 수 있었다. 강아지와 아기를 먹으며 피와 비명을 수집할 수 있었다. 오해하고 의심하게 만들고 추리하고 좌절하게 만들 수 있었다. 타락한 욕정에 부들부들 떨다가 닥치는 대로 물어뜯을 수 있었다. 한없이 후회하게 만들고 관계를 파괴할 수 있었다. 삶의 모든 동력을 절단하고 두려움과 공포로 약을 먹은 짐승처럼 거품 물며 미치게 만들 수 있었다. 귀신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귀신을 내쫓는 거대하고 복잡한 의식을 치르는 무당과 사제들이 있었고 귀신이 들렸다는 혐의로 방에 갇힌 자가 있었을 뿐이다. 비트코인과 메타버스가 휩쓰는 시대의 다른 한쪽에는 강황으로 귀신을 멀리하고 트럭에 소수만 알아보는 글귀를 적고 무당이 되기 싫어 속옷을 몰래 바꿔 입고 잿빛 검은 액체를 한없이 토하는 세상이 있었다. 밍은 학살자였던 아비에게 내린 저주로 악귀가 씌웠다는 단정하기 힘든 이유로 자석에 철가루 붙듯 악귀들의 플랫폼이 되어 금기시되는 거의 모든 행동을 저지른다. 드론의 높이로 보면 가족 몇몇과 동네 사람 몇몇, 그리고 페이크와 논픽션 사이에서 거리 조절에 실패한 카메라맨들을 저세상으로 보낸 풍경일 뿐이다. 과거 또는 현재 곳곳의 학살 행태와 규모에 비하면 귀신이라 불리는 존재가 입히는 피해는 찻잔을 흔드는 정도로 보이기도 한다. 다만 그 찻잔이 한 지역 커뮤니티를 붕괴시키는 정도기도 하지만.


랑종은 오랜 믿음이 자신과 타인을 향한 폭력으로 바뀌는 모습들을 보여준다. 피와 죽음의 퍼포먼스 속에서 공포에 휩싸인 군중은 귀신의 존재를 단정하고 여기에 '귀신을 내쫓는 의식'으로 대응한다. 원시적인 집단 믿음이 원시적인 방어로 이어지고 그 과정에 귀신과 더불어 인간들 역시 통제 불가능의 상태로 빠지면서 상황은 갈수록 귀신을 믿는 자들이 두려워하던 최악의 시나리오로 치닫는다. 믿음이 종교적 색채가 강한 어휘라면 희망으로 바꿔도 결과는 그리 다르지 않다.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노력하면 인간이 인간을 구할 수 있다는 희망, 내장이 다 튀어나오도록 물어 뜯겨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카메라를 놓지 않으면 근사한 무당 다큐 영상을 찍을 수 있을 거라는 희망, 신내림을 피할 수 있다면 피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 자식은 부모를 해하지 않을 거라는 희망, 내 안에 신이 왔는지 아닌지 평생 확신할 수 없지만 끝까지 버티면 어떻게든 될 거라는 희망. 랑종은 이런 나약하고 대책 없는 희망에 빠진 인간들이 어떻게 멸족에 이르는지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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