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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선언, 대량학살의 꿈

한재림 감독. 비상선언

by 백승권

KI501 항공편에 탄 사람 중 하와이에 내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미국, 일본, 한국 어느 곳도 발병과 사망이 빠르게 이뤄지는 바이러스로 가득 찬 비행기의 착륙을 허락하지 않는다. 만약에 경우 공중에서 격추시킬 시나리오까지 갖추고 있었다. 전쟁을 원하는 관제탑은 없었지만 자국민 보호라는 명분을 위해 타국의 여객기 1대와 승객 100명의 목숨을 희생시키는 건 가능했다. 최악을 막기 위해 차악을 선택해야 한다는 주장은 늘 설득력 있었다. 지상의 수백만 명과 공중의 백 명의 목숨값을 저울질할 수 있다는 분위기는 쉽게 무시될 수 없었다. 치료제가 있다한들 검증할 시간도 인력도 없었다. 바퀴가 땅을 디뎌야 뭐라도 진행될 텐데 도무지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파일럿들은 죽거나 다쳤고 객실은 소돔과 고모라였다. 비행기 동체는 수없이 뒤집히며 사람들의 오장육부를 뒤섞었고 바이러스에 먼저 걸린 자들이 안구가 터지고 피를 토하며 죽었다. 바이러스의 출처인 제약회사는 법을 내세워 문을 막았고 공권력은 무능하고 무력했다. 제약회사 입장에서는 이보다 좋은 테스트는 없었을 것이다. 작정하고 다수를 죽이려는 애초 의도는 없었지만 이미 죽어나가는 풍경을 데이터로 남기며 자산화시키기는 편하니까. 영화에서 언급하지 않았지만 주식 시장도 들썩이고 있었을 것이다. 국가적 재난이 누군가의 미래 수익이 될 수 있으니까. 테러가 마치 강남스타일이나 뉴진스 같은 트렌드 키워드가 된 거 같았다. 영어 선교육을 받은 동네 아이들이 가장 빨리 알아챘고 부모들은 집값 떨어진다고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젊은 남성(임시완)이 오래전부터 이러한 혼돈을 아주 체계적으로 기획하고 반복 실험하고 기록하며 실행하고 있었다.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원하는 건 많은 돈 진심 어린 사과 명예회복 이런 게 아니었다. 과거 테러범들이 저런 걸 원했다가 어떤 끝을 맞았는지 학습한 걸까. 그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그저 테러가 실행되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희생자가 속출하는 쇼를 원했다. 유리벽에 피를 토하며 죽어가는 쥐떼들처럼. 얼마나 많은 시간을 이 그림을 시뮬레이션하며 보냈을까. 살아있는 동안 준비하고 실행하고 죽은 후에도 자신의 계획이 실현되고 모두를 고통에 빠뜨린다는 상상은 얼마나 달콤했을까. 비행기 안에서 사람이 죽어가고 아무도 도망 못 가는 상황에서 공포와 혼란 절규가 이어지고 이 광경을 웃으며 보고 있었다. 내가 이뤄냈구나. 이것으로 그는 오랜 시간 노력한 자신과의 약속을 지킨 자가 되어 있었다. 비행기에 탄 어느 누구에게도 개별적 원한은 없었다. 그는 가능한 최대 다수의 고통과 죽음을 선택했다. 전 세계의 즉각적인 멸망을 바란 게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계획한 만큼 죽이고 자신도 죽으려 했다. 특정 신도 섬기지 않고 거대한 망상과 날 선 비판을 마이크 앞에서 부르짖지 않았다. KI501 항공편은 그의 마지막 비행기지만 애초 타려 했던 노선도 아니었다. 만약 그와 같은 의지와 실행력을 지닌 이들이 다수라면 911 사태보다 더 막대한 피해도 가능할 것이다. 대체 왜 그랬을까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래서 치료제는 있는지 비행기에서 내릴 수 있는지 전파속도는 늦출 수 있는지 당장의 목숨만이 해결되어야 할 전부였다. 영웅은 없었다. 살아남아야 할 이유를 가진 각자가 있었을 뿐이다. 비상선언은 공중에서 벌어지는 대량학살의 끔찍한 풍경과 주변의 대응을 보여준다. 비행기도 승객도 관제탑도 각자가 마주한 사상 최초의 중력과 싸우고 있었다. 현실의 어떤 지옥은 마주하는 순간 울 시간도 없다. 눈물은 산산조각 난 비행기 파편을 더듬어야 할지도 모를 유족들의 몫이다. 죽은 자들의 과거는 휴대폰 영상으로 아주 일부만 유산이 될 뿐이다. 아무도 모른다. 그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겨우 노출된 팩트 몇 조각으로는 그들이 어떤 혼돈 속에서 죽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테러범도 모를 것이다. 이렇게 끝내는 게 과연 맞는지. 시작했으니 끝냈을 뿐이다. 남은 건 긴 고통과 후유증뿐이다. 당시의 선택을 이해하면서도 증오를 내려놓을 수 없었던 현수(김남길)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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