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자민 클리어리 감독. 백조의 노래
캐머런은 죽어가고 있다. 발작이 계속되고 있고 언젠가 숨이 멈출 것이다. 아내와 아이는 모른다. 캐머런(마허샬라 알리)은 자신이 없는 가족의 미래를 준비 중이다. 수많은 SF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예견했던 미래, 캐머런은 자신의 복제인간 제조를 의뢰하고 그를 미래의 자신으로 가족 안에 침투시킬 작정이다. 이게 가능한가. 조 스캇 박사(글렌 클로즈)는 머지않아 심장 이식만큼 보편화될 거라고 단언한다. 하긴, 자신의 신기술에 이 정도 확신 없이는 환자를 설득하기 힘들겠지. 캐머런은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연구실에서 자신의 복제인간과 마주한다. 의심의 여지없이 정밀하게 동일하다. 저 하드웨어에 캐머런의 기억만 옮기면 모든 과정은 끝난다. 복제인간 역시 스스로의 존재를 자각한다. 하지만 일정 시일이 지나면 복제인간일 때의 기억은 삭제되고 완전히 캐머런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된다. 백조의 노래는 이 과정에서 기술의 취약점을 의심하지 않는다. 불안한 건 당사자 캐머런의 심경 변화였다.
아내 파피(나오미 해리스)를 처음 마주한 날에 대한 디테일한 기억, 상대가 자신과 같은 취향을 지녔다는 기적 같은 발견, 연애, 결혼, 출산, 그리고 한 가족 구성원에 닥친 사고와 죽음, 절망과 슬픔의 도래, 멈춰진 시간, 무너진 관계, 그리고 회복, 의지, 약속, 각자의 삶에 기대며 힘께 이끌어가는 아이와의 행복한 순간들까지 캐머런의 기억 속에서 순서 없이 난입한다. 시한부 상황에서 복제인간으로 자신을 대체한다는 건 남편, 아빠라는 가족 구성원의 기능적 역할의 부재를 허락하지 않겠다는 것. 그게 가능하다면 남은 가족 구성원은 별 탈 없겠지만 캐머런 당사자는 어떻게 되나. 캐머런이 입장을 번복하는 핵심은 이 부분이었다. 나는 무엇이었나. 그저 이대로 사라지면 그만인가. 남은 자들은 완벽한 배우와 행복한 여생을 보내고 나는... 끝인가. 영화는 여기서 극단을 선택하지 않는다. 복제인간은 자신의 위치와 캐머런의 갈등을 이해하고 있었다. 심지어 캐머런을 위로하고 캐머런에게 마지막 인사의 시간까지 내어준다. 원본 인간이 혼란에 빠져 판단력을 상실한 상황에서 복제인간은 완전히 그 부정적 요소를 보완한 버전으로 섬세한 위로와 대안을 제시하고 있었다. 늦은 시간, 자신의 집에 도둑처럼 들어온 캐머런은 복제인간의 배려로 가족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눈다. 가족들은 모른다. 자신들의 곁엔 여전히 동일한 남편과 아빠가 있으니까.
백조의 노래의 전개는 진지하고 느리지만 그만큼 신중하고 어려운 주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가족이라는 가장 중요하고 작은 집단의 안정적 운영과 행복을 위해서 복제인간으로 구성원을 대체한다는 점은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물론 새로 주입된 기억과 기존의 기억이 섞이지 않고 '고장'을 일으키지 않을 수 있는가에 대한 대안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또 하나, 신체 복제는 그렇다 쳐도 기억과 감정을 옮길 때 (영화에서는 무의식까지 복제가 가능하다고 전한다) 충동과 본능이라는 자칫 부정적일 수 있는 부분이 통제 가능할까. 뇌 속의 칩이 과열되어 연기가 피어오르거나 장기 교체의 여지는 없을까. 이건 영화가 시리즈로 옮겨질 때 풀 수 있는 부분일 것이다. 하나 더 인상적인 부분은 대사에서 복제인간이라는 단어가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미 똑같은 인간들 중 하나처럼 인정하듯이. 앞선 의문들이 들었던 건 에이리언 커버넌트에 나왔던 데이빗의 영향이 있다. 인간의 비뚤어진 욕망마저 고스란히 옮긴 데이빗은 자신의 업그레이드 버전인 월터를 죽이고 안 그런 척 연기한다. 캐머런의 복제인간에게 자각 능력이 있다면 그리고 인간의 불안한 감정이 그렇듯 오류를 일으킬 수 있다면 위험요소는 얼마든지 존재한다. 자신의 선한 역할을 기꺼이 신뢰하는 자만이 남은 가족의 여생과 함께 할 수 있는 복제인간을 자신의 대리인으로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