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 케시시안 감독. 셀레나 고메즈 마이 마인드 & 미
모든 게 너무 공개적이었다
내 과거와 실수들이 날 우울증으로 이끄는 것 같아
루푸스와 류머티즘성 관절염이 겹친 거죠
우리는 우리가 같아질 수
없다고 여기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을 때마다
그 사람들과 더 멀어집니다.
너만이 네가 얼마나 복잡한지 알지
조울증과 제 관계는 좋아질 거예요
이런 다큐가 나오면 쉽게 드는 생각은 이런 것들이다. 앨범 홍보거나 뮤지션 홍보거나 둘 다거나. 다큐멘터리 영화라는 장르를 하나의 도구화하는 것. 이건 그저 비판적 관점만은 아니다. 그게 옳지 않거나 잘못되거나 틀린 게 아니니까. 기존 팬들을 만족시키고 공감대를 통해 새로운 팬들을 유입시키고 음원 소비로 연결되고 다시 긍정적 호의적 공기로 미디어 반응을 바꿀 수 있다면. 정말 비윤리적인 반사회적인 선택으로 공공을 적으로 돌리는 행위를 무마하려는 게 아니라면 얼마든 상관없다. 셀레나 고메즈를 디즈니 시트콤에 나온 적 있는 주니어 배우 경력의 셀럽 정도로 인지하고 있는 내게 셀레나 고메즈 마이 마인드 & 미 다큐는 지나치게 자극적이지도 (홍보 차원에서) 지나치게 노골적으로 보이지도 않았다. 셀레나 고메즈의 기존 음악들을 적극적으로 경험했거나 가십에 정통한 입장이 아니라서 그럴 것이다.
직업인으로 본다면, 음악 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로 본다면 셀레나 고메즈가 겪은 여러 고통들은 산업재해에 가깝다. 음악, 영상, 공연 등의 비즈니스 콘텐츠를 넘어 사소한 대화와 표정 하나까지도 모조리 상품이 된다. 미디어의 표적이 되고 방송의 재료가 되며 대중 재판의 희생물이 된다. 헤드라인에 살해되려고 뮤지션을 꿈꾸는 사람은 없지만 군중의 가면을 쓴 다수는 셀럽들이 겪는 과도한 관심으로 인해 파생되는 고통을 당연히 치러야 할 대가로 보기도 한다. 우리가 관심을 주니까 너의 고통은 유료야. 넌 그걸로 돈을 벌잖아. 이런 입장이기도 하다. 안 그래도 무언가를 말하고 욕하고 싶어 안달이 났는데 셀럽의 사생활은 더할 나위 없는 장작이다. 각자의 견디는 법을 익히겠지만 근육이 형성되기도 전에 온몸의 면역이 무너진다. 루푸스. 자가면역질환으로, 인체 외부로부터 지키는 면역계의 이상으로 오히려 면역계가 자신의 인체를 공격하는 현상이 특징(*서울대병원 자료 발췌). 여기에 류머티즘성 관절염이 겹치고 셀레나 고메즈는 수년간 무대에 오르지 못한다. 오랜 연인과 이별 뉴스는 화형대에 오른다. 아무리 울어도 불길은 꺼지지 않았다. 가족과 친구는 고마웠지만 물리적으로 그들이 대신 아픈 건 아니었다.
미취학 아동일 때부터 방송일을 하며 도망치고 도망쳐서 좋기도 했다. 미디어 노출과 더불어 치솟는 인지도는 순식간에 슈퍼 클래스 셀럽을 만들었다. 그때 이미 셀레나는 스스로 컨트롤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계약과 일에 따라 움직여야 했고 모두를 끌고 가는 동시에 모두에게 이끌려 가야 하기도 했다. 누군가를 도울 수 있는 위치로 자신을 인지할 수 있을 때 남다른 기분에 젖었다. 자선사업을 여생의 비전으로 꿈꾸는 것은 또 이를 추동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것은 대부분의 인류에겐 불가능한 일이다. 셀레나 고메즈는 자신의 긍정적 의지가 어려운 처지에 놓인 다수의 삶을 바꾸길 간절히 원하고 직접 움직였다. 이렇게라도 해야 현실의 무거운 족쇄로부터 잠시 벗어나 내 뜻대로 내 삶을 이끈다는 환상에 잠길 수 있었다. 타인의 관심은 돈이 되고 그 돈으로 다시 타인의 처지를 바꿀 수 있는 결정권이 있었다. 표정을 일그러뜨리는 헛소리가 난무하는 환경 속에서 셀레나 고메즈는 자신의 마인드를 해석해 곡을 쓰고 발표하고 무대에 서고 주어진 일을 해내기 위해 멈출 수 없었다. 다수와 엮여 있는 자신의 임무를 방기 하지 않았다. 수많은 사람과 만나고 그들의 이야길 듣고 자신의 의견과 조율하고 새로운 것을 다시 만들기 위해 고통을 감내했다. 고통이 깨달음의 티겟이 될 수 있다면 다큐멘터리로 보는 셀레나 고메즈는 그 티켓을 거머쥘 자격이 충분해 보였다. 고통은 멈추지 않고 깨달음은 계속되는 동안 셀레나는 자신의 비전을 향해 뭔가를 하고 있다. 가장 크고 복잡한 적인 자기 자신의 마음과 싸우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