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퍼 캐슬 감독. 전쟁의 종식자: 오펜하이머와 원자 폭탄
1만 2천7백여 개. 전 세계 핵탄두 보유수다. 미국과학자연맹의 지난해 발표 자료다. 러시아와 미국이 대부분 가지고 있다. 원자폭탄 개발의 핵심, 오펜하이머의 우려는 통제 불능 수준의 현실이 되었다. 크리스토퍼 캐슬 감독의 다큐멘터리 <전쟁의 종식자: 오펜하이머와 원자 폭탄>는 오펜하이머를 중심으로 최초의 원자폭탄 개발과 일본 투하 이후의 이야기까지 인류를 영원히 바꾼 역사를 편집해 보여준다. 히로시마 원폭 투하는 어릴 적부터 관심 있는 주제였고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오펜하이머> 개봉에 맞춰 한번 더 살펴보게 되었다. 인류는 여전히 영향을 받고 있고 파괴와 죽음, 종전 이후의 여파는 지금까지 진행되고 있다.
새롭게 알게 된 부분은 일본 원폭 투하가 하나의 실험이었다는 점이다. 히로시마 선정 이유가 넓은 평지로 이뤄져 원폭 투하의 피해 규모를 비교적 변수 없이 디테일하게 파악할 수 있다는 점은 이 공격이 전쟁 승리라는 단일 목적이 아니라는 점을 일깨워준다. 새로운 자동차를 개발해 실제 지형과 도로에서 주행 성능을 테스트하듯, 히로시마 원폭 투하는 미국이 개발한 신무기의 실전 파괴력을 제대로 확인하는 자리였다. 순식간에 파멸한 도시와 더불어 수십만 목숨(히로시마, 나가사키 사망자 약 21만 명 추정)이 사라지고 부상을 입었다. 생존자들의 부상 부위는 나란히 서서 사진에 찍혀 기록과 정보가 되었다. 오펜하이머는 평생 죄책감에 휩싸여 살지만 원폭 투하 성공 당시에는 찬사와 영예를 기꺼이 누렸다. 그는 투하 결정 직전까지 민간인 희생자 발생에 대해 괴로워했지만 가장 대대적으로 피해를 입힐 수 있는 지역을 선정하는 데에는 머뭇거림이 없었다. 수백수천만 명이 될지도 모를 미래의 불특정 희생자를 막아야 한다는 명목으로 수십만 명의 실제 사망자를 유발했다. 연합군 수뇌부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이 감내해야 하는 부수적 피해로 계산했을 것이다. 적국이었던 독일보다 앞서 개발하려다 히틀러가 자살했고 일본에 투하해 무조건 항복을 받아낸 이후 러시아와 핵개발 경쟁에 들어가며 인류를 자멸 위기로 몰아가고 있다. 오펜하이머는 일본 패전 이후 핵 개발 확산을 저지하려 했지만 러시아가 나서 핵 실험을 성공한 상황에서 (트루먼 대통령을 중심으로) 미국 입장에서는 용납할 수 없었다. 핵개발 프로젝트의 핵심이자 승전의 주축이었던 오펜하이머는 핵 확산 저지의 의지를 굽히지 않음으로 결국 국가에 의해 처절하게 배척당한다.
세계 역사상 가장 강력한 무기 개발 및 사용의 핵심 인물이 이를 후회하고 절대적으로 반대하며 여생을 보냈다는 점은 다양한 시나리오를 떠오르게 만든다. 한 인간의 한계는 그가 저지른 사건의 영향력을 능가할 수 없다는 점. 오펜하이머는 인류 자멸의 시작점이 될만한 방아쇠를 당길 수 있었지만 총알의 궤적을 컨트롤할 수 없었다. 그 총알이 선악의 구분 없이 만인의 오장육부를 파헤치는 참상 앞에서 그저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업보였고 역사였으며 인류를 영영 겁박할 끔찍한 유산이었다. 그가 피 말리는 시간을 과학자들과 분투하며 원자폭탄을 쏘아 올리지 않았다면 결국 독일이 서방국가를 모조리 괴멸시키고 절대악이 되어 군림했을까. 현재의 핵 억제는 언제까지 공멸을 미룰 수 있을까. 오펜하이머는 일본 상공에 거대한 버섯구름이 피어오르는 순간 아이콘이자 신화가 되었다. 과정과 결정을 함께한 수많은 권력자들은 그의 이름 뒤에 숨어 윤리적 비난을 피하며 수명을 유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승리에 뒤따르는 희생이란 논리는 얼마나 편리한가. 언제까지 모든 책임을 죽은 자의 무덤 위에 덧씌울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가끔 <테넷>의 악당 사토르를 떠올린다. 그는 자신에게 죽음이 닥치기 전 전 인류를 죽이기로 작정한다. 자신이 없을 미래를 아무도 누리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오펜하이머의 윤리적 갈등은 원자폭탄의 실제 위력과 파장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는 점에 주목해 본다.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되돌릴 수 없는 일을 하고 싶어 하고 결국 하고 나서 끔찍한 결과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게 인간의 나약함이다. 동족들을 다수 죽이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의 거대한 성과를 기어이 확인해보고 싶은 욕망의 인간. 나 역시 연합군이 승리한 전쟁 이후에 태어나서 이런 한가한 소리나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1945년 8월 원폭 투하 이후 공식적으로만 1만 2천7백여 개의 핵탄두로 둘러싸인 세상 속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