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 에스터 감독. 보 이즈 어프레이드
보는 태어난다. 아이 보는 자라서 어른 보(호아킨 피닉스)가 된다. 보는 오랜만에 엄마를 방문하려 했지만 실패한다. 비행기표를 잃어버리고 보의 거주지는 파괴된다. 갑자기 걸려온 전화는 엄마의 사망 소식을 알린다. 보는 장례식에 참여하려고 했지만 차에 치인다. 보는 어느 부부의 집에서 깨어난다. 그들은 전쟁에서 아들을 잃고 정신이 온전치 않은 아들 친구를 돌보고 있고 딸은 상대적으로 소외되어 있다. 보는 엄마 장례식에 서둘러 가야 한다고 일어나지만 그들은 보의 부상을 염려하며 전자발찌를 채워가며 말린다. 보는 그들이 죽은 아들을 오랫동안 기리는 방식을 보며 자신의 과거를 회상한다. 그러다 그들의 딸과 함께 그곳을 탈출하지만 길을 잃는다. 길을 잃은 숲에서 연극에 참여한다. 그곳에서 죽은 줄 알았던 아빠(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남성)를 잠시 마주한다. 모를 일이다. 그러다 전자발찌를 추적해서 보를 쫓아온 운전자 부부의 죽은 아들의 정신이 온전치 않은 동료 남성이 대량 살상 무기로 보 주변을 폭파시킨다. 보는 도망치고 엄마의 집, 엄마의 장례식장, 엄마와 자신이 어릴 적 함께 보낸 집에 도착한다. 관 속 엄마의 목이 없다. 샹들리에가 떨어져서 그렇게 됐다고 한다. 보의 엄마는 거대한 그룹의 대표이고 보를 홀로 키우며 자산을 일군 유명인이다. 보가 자라며 왜 엄마와 분리가 되었는지 회상과 환상이 뒤섞여 분간하기 어렵다. 보의 첫사랑처럼 보이는 여성이 접근한다. 보는 내내 그리워했다며 고백하고 둘은 보의 죽은 엄마의 집에서 섹스한다. 그리고 보의 첫사랑이 현장에서 사망한다. 그때 보의 엄마가 등장한다. 보의 엄마는 죽지 않았고 보는 짐작하고 있었다. 보의 엄마는 보를 오해하고 원망하고 보는 그런 엄마에게 이유를 설명하지만 갈등은 깊어진다. 보의 엄마는 보에 대한 엄청난 배신감을 느끼고 있었다. 간극이 좁혀지지 않는 대화 속에서 보는 충동적으로 엄마의 목을 조른 후 집을 빠져나오지만 이내 공개 심판장에 들어오게 된다. 그곳에서 평생 동안 보가 엄마에게 저지른 불효의 죄가 만방에 알려지고 엄마는 분노와 슬픔, 절망을 감추지 못하며 보는 내내 당황하다가 죽음, 사형의 위기에 몰린다. 마치 임신한 여성의 몸속에 대한 은유로 보이는 깊고 어둡고 둥근 공간 속에서 태초의 어린 보가 생성되고 형태를 갖췄던 여성의 신체 내부와 닮은 그곳에서 성인 보는 수장된다. 꿈틀거리다가 움직이지 않는다. 보는 죽은 걸까 되돌아간 걸까 꿈인 걸까.
이건 마치 부모의 억압을 토로하다가 가장 안 좋은 버전으로 끝난 심리 상담의 공포영화 버전 같다. 또는 백 명의 관람객이 자기만의 백가지 이야기로 해석할 수 있는 우화. 봉준호 감독은 이 영화에 인생의 여섯 시간 정도를 바쳤다고 했지만 나는 그러고 싶지 않다. 부모의 재산과 자식의 행복을 동일 선상에 놓지 않는 설정은 흥미로웠다. 부모는 자신이 헌신한 만큼 자식에게 돌려받지 못하면 견딜 수 없어한다는 대사 역시. 영화는 내내 가학적이다. 모든 장면에서 보를 고문하고 그의 고통과 괴로움을 즐긴다. 보가 마주하는 모든 인물들은 보에게 욕하고 물건을 훔치고 집에 무단침입하고 칼로 찌르고 자동차로 치고 감금하고 속이려 들고 죽이려고 한다. 마치 보는 그렇게 당해도 된다는 듯이 무참하게 다룬다. 같은 배우가 연기한 조커 캐릭터의 연장선처럼 보이기도 했다. 왜 태어났는지 모르는 이에게 뭐 하러 태어났냐고 조롱을 멈추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