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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웨일, 어떤 삶이든 마지막 기회는 있다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 더 웨일

by 백승권

이 글의 제목은 영화에게 느껴진 감상이다. 내 생각과 다르다. 영화를 본 후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거대한 죄를 짓고 타인에게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준 삶에게도 갱생과 용서의 기회가 마땅하냐는 질문에 내 입장은 긍정이 아니다. 감독은 자신의 캐릭터를 용서했을지도 모른다. 찰리(브렌든 프레이저)에게 그런 자격이 있을까. 얼마 남지 않은 거구의 삶, 버림받았던 가족들은 그의 처지가 가엾어서 불편한 마음을 누르려 용서의 카드를 들었을지도 모른다. 반 강요에 가까운 용서. 하지만 난 그의 가족이 아니니까. 찰리가 과거에 저지른 과감한 선택은 용서받기엔 너무 잔인했다.


찰리는 결혼하고 아이가 생긴 후 마주한 (찰리 자신에게는) 운명의 사랑을 선택했다. 선택의 대가로 가족을 버렸다. 복잡하지 않다. 찰리에겐 남편과 8살 아이의 아빠가 되기보다 사랑하는 남자와 사랑하는 게 더 중요했다. 이성과 도덕률로 판단할 영역이 아니라고 스스로를 끊임없이 설득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걸 훗날 “실수”라고 자기변호를 위해 말하는 건 치졸하다. 차라리 용서를 바라지 않는다고 반복하는 편이 더 나았을 것이다. 하지만 찰리는 그러지 않았다. 너무 많은 부분들이 무너져 내려 통제 불능 상태였다. 접근하는 사람들은 사이비 종교에 빠져 집에서 쫓겨난 청년(타이 심킨스)과 죽은 애인의 간호사 동생뿐이다. 둘 다 각자의 구원과 죄책감을 안고 ‘필요에 의해’ 찰리의 곁을 맴돈다. 찰리는 자신에게조차 그렇듯 중심이 아닌 도구일 뿐이다. 그리고 더 웨일은 그를 구원할 가느다란 실을 내려준다.


딸(세이디 싱크)은 자기 버리고 애인과 도망친 시한부 아비를 단숨에 용서하고 구원으로 인도할 대천사가 아니다. “역겨운” 거구의 몸뚱이를 느닷없이 찍어서 SNS에 올리고 지옥에서 불타라고 저주하는 독기 가득한 10대다. 식칼을 쥐고 망설일 만큼 찰리에 대한 살의가 넘치지만 돈이라도 남겼는지 확인해야 해서 에세이 숙제를 맡긴다. 찰리에겐 대환영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를 맡겨서 사죄의 구실을 얻었으니까. 대화를 이어가고 단서를 흘리며 불가능한 용서를 계속 호소한다. 시간차를 두고 찾아온 아내(사만다 모튼)에게도 마찬가지다. 아주 오래전 부부와 부모로서 좋았던 점을 기어이 뒤지고 뒤져 먼지를 털어내며 소환한다. 애인이 죽은 후 망가진 삶, 찰리에게 남은 건 쓸쓸하고 비루한 죽음뿐이었다. 그 직전에 돈이라도 챙길 가족이 급습해서 억지 구원의 마지막 무대를 꾸며 주고 있었다.


가해자의 죽음은 그렇게 용서의 만능키일까. 용서를 하든 안 하든 피해자들은 상처받은 과거와 굴곡진 삶을 구제 받을 수 없다. 결국 용서는 (가해자가 죽고 떠난 후) 남은 피해자들의 보다 안온한 삶을 위해서 거쳐야 할 필요악 같은 존재가 된다. 용서를 안 하면 더 오래 고통받는 건 살아남은 피해자 자신이 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찰리가 다방면으로 자신의 열악함을 노출하고 끔찍했던 과거가 드러나며 물리적인 움직임조차 제한된 열악한 조건이라는 점은 (나 같은) 관객을 매우 갈등하게 만든다. 저렇게 지금 힘들어 보이는 데 인간이 뭐라고 인간을 용서하고 자시고 인가. 어차피 죽으면 끝날 인생, 이제 다 부질없고 맘이라도 편안히 눈을 감으라고 사람 좋은 미소를 보여줘야 하나.


배신은 한 번에 그치지 않는다. 가족을 배신한 찰리가 애인의 유산을 숨기고 친구 리즈(홍 차우)의 희생을 방관한 것 또한 배신에 가깝다. 찰리는 자신이 추구하는 소중한 가치를 위해 주변인의 희생엔 잔혹할 만큼 무심하다. 자신의 가치관과 감정을 항상 최상위에 두고 우선순위를 양보하지 않는다. 애인이 살아있을 땐 가족을 희생시키고 애인이 죽었을 땐 애인의 동생이자 친구를 희생시킨다. 이런 상황에 신은 개입할 수 있는가. 전혀. 신은 인간의 대화와 믿음 안에 존재하려 하지만 누구도 신의 덕을 본 자가 없어 부정당하기 바쁘다. 차라리 가족 해체의 원흉이라고 불리는 게 더 어울릴 것이다. 하지만 작가와 감독은 어떤 식으로든 찰리가 숨이 붙어 있는 내에 용서해 주려 딸을 이용한다. 딸이 원한다면 찰리는 모든 불가능에 도전할 기세니까. 딸은 마치 예수가 빙의한 듯 찰리에게 기적을 명령한다. 두 발로 걸으라고. 찰리는 죽을힘을 다해 행한 후 최후의 빛과 마주한다. 그는 바다를 향해 나아가려는 고래가 되려는 듯 해변에 서 있다. 어린 딸은 작은 무덤이라도 파는 듯 모래놀이를 하고 있고. 찰리는 삶과 살을 채우던 모든 고통과 좌절을 뒤로한 채 떠나는 중이다. 모든 풍경을 사진처럼 관망하는 저 높은 신의 관점 아래에서.


이 글의 제목을 정정하고 싶다. 어떤 삶에겐 마지막 기회조차 없어야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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