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서바이벌 리얼리티, 사이렌: 불의 섬
서바이벌 리얼리티에 대한 호감이 없다. 예능엔 각본이 있고 그래서 리얼리티와 다르다는 견해가 있으며 애초 예능 장르에 대한 소비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영화가 작가와 연출, 영상과 메시지 등에 의해 콘텐츠 자체의 완결성을 확보했다면 서바이벌 리얼리티는 너무 많은 부분을 시청자에게 맡기고 있다는 인상도 있다. 조금 줄여 말하면 영화는 신뢰를 확보한 영상 콘텐츠이지만 서바이벌 리얼리티(예능)는 아니다. 넷플릭스 사이렌: 불의 섬(이하 사이렌)은 서바이벌 리얼리티지만 서바이벌 리얼리티라서 본 것은 아니다. 우영우 때와 마찬가지로 빠르게 번진 열광의 정체를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그리고 두 번 정도 눈이 붉게 젖었다. 장작패기와 우물파기를 보다가.
소방팀의 한 명이 홀로 모든 장작을 팰 때 난 내가 이 시리즈에 이미 반했음을 직감했다. 홀로 도끼를 들고 커다랗고 단단한 통나무를 향해 내려치며 도끼날에서 쩍! 소리가 어둠을 같이 쪼갤 때 역대 한국 영상 콘텐츠 사상 최초의 캐릭터를 목격하고 있었다. 소설 칼의 노래에서 김훈 작가가 그린 이순신, 영화 봉오동 전투에서 최후의 임무 완수를 위해 어둠과 고독 속에서 목숨을 걸고 달리던 이장하(류준열), 왕좌의 게임 바스타드 전투 에피소드에서 전장을 뒤덮으며 달려드는 적군을 마주하고 맨 앞에 나서서 검을 뽑았던 존 스노우(키스 해링턴)가 유사했다. 사이렌의 저 캐릭터는 소방관이었다. 소방관 역할을 맡은 일반인 배우가 아니라 직업이 소방관인 현직 소방관이었다. 내 뒤에 우리 팀 누구도 도끼에 손대지 않게 하겠다, 우리 팀 누구도 장작을 패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가 정민선(정민선)의 각오이자 태도이며 실행이자 결과였다. 주어진 모든 통나무가 정민선이 내리치는 도끼날 앞에서 찢어먹는 치즈처럼 모조리 갈라졌다. 희생과 결기, 투지와 몰입, 고뇌와 압박, 실행과 파괴, 뼈와 근육, 땀과 열기가 뒤엉켜 아레나의 불빛과 공기를 모조리 분쇄하고 있었다. 정민선은 이후에도 소방팀을 포함 모든 팀의 캐릭터들 중 가장 돋보였다.
사이렌의 우물파기는 맨손으로 지옥의 갱도까지 파내려 가는 그림을 완성하는 데 성공했다.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카지노, 윤종빈 감독의 범죄와의 전쟁:나쁜 놈들 전성시대, 김지운 감독의 달콤한 인생, 유하 감독의 비열한 거리 등 어떤 영화도 (사람을 묻기 위해) 땅을 파는 장면에서 저런 광기를 보여주지 않았다. 범죄 과정의 노동이자 자백과 길들임을 위한 겁박과 유희였다. 사이렌의 삽질 팀전은 인간이 주어진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하나의 목적이 아닌 과정에 있어서 근사한 태도를 보여줄 수 있는지 입증한다. 과정이 목적을 어떻게 초월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쉬지 않는 육체와 시간으로 포기하지 않는 신념을 증명하는 일이란 얼마나 힘든지, 하지만 그렇다고 정당하게 획득한 특권으로 상대방의 성취를 압살하기 위해 쓰는 일을 거부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적의 패배가 우리의 승리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얼마나 많은 프로그램들이 나 살기 위해 남 죽이는 인간의 야비함을 잔인한 본성으로 포장하며 정당화했을까. 우물파기 미션에서 사이렌의 각 팀과 인물들은 이건 게임이고 쇼지만 선을 넘으면서까지 야만적인 행위를 저지르지 않겠다는 선언적 퍼포먼스와 메시지를 자주 보여준다. 그리고 계속 죽어라 판다. 실제 위급 상황에서 사람의 목숨을 구할 때도 저랬겠지 라는 강한 확신이 들 정도로. 기어이 기어이 저 미지의 깊은 곳에서 단련된 육체와 정신력으로 물(생명)을 끌어올린다.
사이렌의 다음 사이렌이 가능할까. 장작패기와 우물파기 같은 새로운 최초가 다시 바다를 가른다면 프로그램 장르를 떠나 애써 피할 이유가 없다. 다시 눈물겨울 수 있다면 얼마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