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솔희 감독. 비닐하우스
앞이 안 보이는데 기억이 흐려지면 언젠가 앞이 안 보인다는 사실도 잊게 되는 거 아니냐는 농담. 의사 친구를 향한 태강(양재성)의 농담을 듣고 웃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웃기지 않아서가 아니라 앞이 안 보이고 기억도 잃어가는 태강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태강은 정신과 언어 기능이 온전치 않은 아내와 둘이 산다. 깨어있는 시간엔 간병인 문정(김서형)이 와서 끼니, 빨래, 청소 등을 살뜰히 챙겨준다. 아들은 처자식과 해외에 있다. 이따금 영상통화로만 안부를 나눈다. 태강과 문정이 대화할 때 시선은 마주치지 못하지만 둘은 서로를 깍듯이 대하고 깊이 신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남성 노인과 여성이 서로를 존중한다는 설정은 생경하다. 그는 아내에게도 그렇게 대하고 친구들에게도 크게 다르지 않다. 태강 같은 성인 남성을 한국 영화에서 볼 수 있다니 너무 신기했다. 생태계에서 사라진 종을 목격하고 있는 것 같았다. 태강은 자신과 아내를 돕는 문정의 고마움을 잘 알고 있다. 금전으로 쉽게 환산하기 힘든 모든 곳에 손발이 가는 가사 노동의 버거움과 두 노인 환자의 케어가 얼마나 고단한 일인지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타인에 대한 배려와 별개로 태강의 여러 신체 능력은 퇴화 중이었다. 태강은 두려웠다. 어느 날 자신이 자신을 완전히 모르게 될 때 아내의 곁에 온전히 있지 못하게 될까 봐. 태강에게 그건 죽음보다 두려운 일이었다. 직접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화장실 구석에 목을 매는 연습을 하는 태강의 모습이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이런 태강의 고민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태강에게 남은 일은 기억이 사라진 후에 자신이 모르는 사이 죽거나 기억이 사라지기 전에 사건사고를 여러 번 겪다가 죽거나 중 하나처럼 보였다. 물리적으로 앞이 보이지 않는 삶에서 기억까지 잃는 일은 남은 기간에 대한 자발적 단축을 심도 있게 고려하도록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어떤 고민도 선명한 해결책은 아니었다. 그동안 태강의 주변은 더더욱 그랬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곳에서 온갖 생지옥이 칼춤을 추고 있었다. 아내가 죽고 아내 대신 다른 노인이 마주 앉아 밥을 먹고 있었으며 헌신적이었던 간병인은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태강은 아무것도 몰랐다. 문정이 가까스로 숨기고 있었기 때문에. 문정의 현실 역시 생눈을 치켜떠도 앞이 안보이긴 마찬가지였다. 떨어진 자식과 사는 게 삶의 유일한 목표였고 이를 위해 모든 고난을 감내하며 살았는데 살인에 엮이고 모든 꿈이 파괴된다. 다시는 이어 붙일 수 없을 정도로. 문정은 결국 타인의 죽음을 덮고 자신의 이기심을 선택한다. 스스로는 버려도 자식은 버리기 싫었다. 이것만이 생존의 유일한 이유였고 이를 위해선 어떤 대가도 치를 수 있었다. 서로를 존중하고 신뢰했던 태강과 문정의 입장이 침묵과 은폐 속에서 격돌하고 있었다. 죽음은 실행되는 순간 돌이킬 수 없다. 더 많은 노인과 아이들이 원하지 않던 방식으로 세상을 떠나고 있었다.
상실은 필연인가. 시간과 함께 생물학적 퇴화가 일어나는 인간의 삶에서 신체 기능과 이동 속도의 저하로 볼 때 그러하다. 기력과 기억력과 판단력이 완전히 소진되기 전에 남은 힘을 자신의 최후를 위해 쏟아부으려는 태강의 시도와 실행은 참담했다. 그는 혼자 있는 시간 엉엉 울지 않았다. 소리 내어 스스로에게 동정과 연민을 쏟지 않았다. 마치 생각으로 수만 번의 시뮬레이션을 한 것처럼 모든 과정에서 신중하고 침착했다. 스스로를 의식하지 않았다. 죽음을 실행하기 전 사후 목격자의 충격을 최소한으로 하기 위해 커다랗게 쪽지를 남겼을 정도로 그는 침착했고 단호했다. 다만 문정으로 인해 그 과정에서 자신이 영영 인지하지 못한 변수가 생겼을 뿐이다. 어떤 도미노가 넘어지면서 이렇게 난장판이 된 걸까. 홀로 남은 문정은 어디까지 거슬러 올라갈까. 최후의 피해자인 자신을 학대한 들 아무 소용없지만 이게 아니면 어떤 감정도 해소될 수 없다면 어떡해야 할까. 이런 극단 속에서 죽음은 선의일까 치료일까 도망일까. 자신의 최후를 면밀히 따지며 준비하려 했던 태강과 달리 문정의 선택지는 모조리 낭떠러지 같았다. 자식, 부모, 치근덕거리는 남성, 우연히 알게 된 여성까지... 자신을 혐오하는 인간에게 주변인들마저 버러지와 다를 게 없었다. 자식은 그나마 자신의 인생에 용서를 빌기 위한 시간을 연장해 주는 장치처럼 여겨졌을 뿐이다. 문정은 자신의 삶을 아끼고 사랑할 능력이 없었다. 그동안 겪은 인간들이 모두 빼앗아갔으니까. 더 이상 죽일 사람도 없었다. 비참하게도 이젠 유일하게 누울 곳마저 없었다. 더 이상 잃을 게 없다고 여겼던 문정의 삶과 세계의 생명은 완전히 불타 사라져 버렸다.
영화 비닐하우스는 인류 최후의 날의 풍경처럼 그려진다. 남성들, 여성들, 아이들, 집까지... 모든 생명과 존재가 사라진다. 선의와 악의와 상관없이 죽음은 우연과 오해, 억압과 복수 속에서 각자를 사정없이 덮친다. 어쩌면 착각과 외면 속에서 가려져 있던 가장 살벌한 현실의 내면을 손실 없이 세심하게 커팅해서 잘 옮겨놓은 것은 아닐까. 보고 싶지 않고 알고 싶지 않고 인정하고 싶지 않은 진실들이 불길이 솟기 전부터 온통 자욱하게 깔려 있었다. 우리 중 일부도 언젠가 이 자욱함 속에서 길을 잃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