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다크 나이트
목적이 불분명함을 알아채는 순간 사람들은 혼돈에 빠진다. 어떻게든 명분을 만들려 애쓰고 대의를 담기 위해 고민한다. 의미와 실행 사이의 비중을 저울질하고 때론 결과가 어찌 되든 합리화시킨다. 애초부터 불완전했던 나를 뒤로 한 채 타인과 상황의 탓으로 돌리고 죄를 대신할 (비난받아 마땅할) 제물을 찾는다. 가장 가까이에 있다 여기며 의지했던 존재를 가장 위태로운 순간에 저주의 대상으로 돌리며 대중은 집단의 우둔함을 가리기 위해 거짓의 장막 안에 숨는다. 모두가 손가락질하는 순간 거짓은 진실이 되고 영웅은 천하의 악당이 된다.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편을 가르고 스스로가 항상 선의 편에 있다고 믿는다. 악마는 모든 악을 일일이 실행하는 자가 아니다. 인간들이 자신들의 생각을 (어리석음조차) 늘 옳다고 믿게끔 구실을 만들어 줄 뿐이다. 인간은 그렇게 자멸한다. 죽는 순간까지도 자기 선택이 최선이었고 어쩔 수 없다고 여기며.
조커가 마지막 순간까지 웃을 수 있었던 이유는 이러한 인간들의 속성을 정확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를 따른 자들의 목적은 불법을 통한 부의 축적이었지만 그는 어떤 동기도 없이 파괴 자체에 악의 존재 근거를 둔다. 이것이 자기뿐 아닌 모든 인간의 가장 악독한 성품임을 인지한다. 서로를 불신하게 만들고 범죄의 도구가 되기 위해 기꺼이 모이게 한다. 심연을 파고들어 미끼를 물게 하고 가장 지독한 순간에 가장 처참히 무너지게 만든다. 너희가 믿는 희망은 두려움을 통해 싹튼 신기루일 뿐 희망 따윈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음을 스스로 증명하게 만든다. 희생시키고 좌절시키며 끊임없이 악의 확산을 주도한다. 그리고 그 광경을 즐긴다. 벼랑 아래로 몸을 던지며 집단자살하는 레밍들을 보며 환호와 박수를 보낸다.
누군가 나서 조커를 처단하면 끝날 문제가 아니었다. 조커의 목적은 모든 인간들 마음속에 숨겨진 조커를 꺼내는 것이었고 이것은 최초의 조커가 죽는다고 사라지는 게 아니었다. 이를 위해 조커는 타인의 선의를 처절히 이용한다. 판단을 주저하고 단죄를 망설일수록 일은 커져가고 악은 더욱 완전해진다. 정의를 부르짖는 목소리가 커질수록 악의 화력은 거세질 뿐이다. 선은 악의 화력을 위한 땔감에 불과했다. 조커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이들의 입가에 칼날을 들이대며 미소 짓는 얼굴을 갖게 된 자신의 트라우마를 읊어준다. 살육을 즐기고 희망의 존재가 감지되면 마저 제거한다. 지금껏 옳다고 여긴 모든 정의들에 의구심을 품게 하고 악행이 도리어 나을지도 모른다고 믿게 한다. 사탄도 처음에는 천사였다. 조커는 지옥의 불길에 휩싸인 도시를 질주하며 영웅에게 의지하는 세상을 조롱한다. 영웅 또한 현실의 불균형을 조장하는 일부에 지나지 않음을 만천하에 공개하려 한다. 누가 이길까. 선도 악도 이미 결론을 알고 있다.
다크 나이트에서 가장 섬뜩했던 점은 조커의 외모에 뿜어져 나오는 악의 기운이 아닌 그가 사람을 다루는 방식이었다. 정의의 역할은 이미 악해진 세상을 정화시키는 것이 아닌 덜 악해지거나 악의 진행이 좀 더 느리도록 완충하는 것뿐이었다. 사람들은 이러한 환경에서 악과 공존했고 선을 이상향으로 내세웠다. 악은 현실, 선은 희망사항. 어느 쪽이 더 유리할까? 정의로운 인간은 보이지 않는 것을 이루기 위해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부정해야 한다. 끊임없이 대치하고 긴장해야 하며 이렇게 살아야 하는 (그런 길을 선택한) 자신을 설득해야 한다. 이를 위한 동력은 스스로의 신념 또는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얻어진다. 세상에서 가장 컨트롤하기 어려운 이 두 가지를 지키기 위해 악과 맞서야 하지만 불행히도 악은 상대의 이러한 아킬레스건을 잘 알고 있다. 후벼 파는 순간 고통에 절규하며 자신이 얼마나 연약했는지 상대가 깨닫는 과정을 지켜보며 조커는 칠흑 같은 눈과 찢어진 입술로 실성한 듯 웃는다. 상대의 패를 알고 있었고 이미 승자였다.
보통 사람 이상의 능력을 지닌 이른바 영웅들이 저지르는 가장 심각한 오류라면 자신들이 세상을 더 좋게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배트맨 또한 다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가진 부와 재능, 사람들을 이용해 최첨단 무기를 만들고 공권력이 할 수 없는 일을 대신 해결한다. 순수한 의도였고 스스로 만족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도시의 평화에 일조한다고 여겼다. 자초한 부담이었다. 선의 속내는 유약했고 늘 의심의 대상이었다. 악은 선과 반대쪽이 아닌 선의 약점-선이라 불리는 또는 선이 지켜야 할 수많은 것들-을 파고들어 선의 상위로 올라선다. 악은 약점이 없었다. 악 자체가 장점이자 강점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배트맨이 뭘 할 수 있을까. 자신이 지켜야 한다고 믿었던 모든 기반이 무너지고 자신의 존재 이유조차 확실치 않은 상황에서 선의 수호자를 자처하며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이 지금껏 유지해 온 모든 논리에 합당한 것인가. 그저 자기만족만을 위해 나서면 그만인가. 파괴 자체에서 쾌감을 얻는 조커와 무엇이 다른가. 악을 위해 악을 저지르는 것과 선을 위해 부득이하게 필요악을 저지르는 게 같은 결과라면 둘은 결국 동전의 양면일 수밖에. 배트맨은 상식적으로 사고하려는 인간이지만 조커는 인간의 기존 상식을 초월한 존재였다. 배트맨은 선, 조커는 악. 공존은 필연이었다. 결코 서로를 죽일 수 없었다. 죄수의 딜레마처럼 양극단에서 내린 판단으로 같은 최악에 이를 수밖에. 선이 더 큰 악으로 누르지 않는 이상 선은 악을 제압할 수 없었다. 이 방식을 선택하는 순간 배트맨이 돌아갈 곳은 연인과 친구가 아닌 어둠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