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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년 만의 엘지 우승을 보며, 머니볼

베넷 밀러 감독. 머니볼

by 백승권

야구를 사랑하지 않는다. 관심이 적다. 지인들은 주로 두산과 롯데, 삼성팬으로 갈린다. 난 김하성 등 해외파의 근황, 박찬호가 120년 전에 뛰던 팀, 이승엽과 김성근 감독의 이름, 이대호의 인상착의, JTBC 최강야구의 인기 정도를 인지하는 정도. WBC 때도 시큰둥했다. 특히 한일 결승전, 박지성과 황희찬의 패스를 받고 손흥민이 일곱 골을 넣은 것도 아닌데 브라운관을 눈빛으로 깨부술듯한 표정들에서 난 예외였다. 아 (너무 오래 전이긴 한데) 양준혁 현역 은퇴 전, 우연히 잠실경기장 가서 삼성 대 두산 경기를 본 적 있구나. 그것도 초반 난타전 지나고 치킨만 뜯었다.


이렇듯 너무할 정도로 야구와 가깝지 않은 내게도 영화 머니볼은 구단장이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 가늠하게 해 준다. 전통적 가족역할에 비유하자면 감독이 엄마, 구단장은 아빠 정도. 감독이 선수들을 근거리 관리하며 전략을 지휘하고 현장에서 경기를 컨트롤한다면 단장은 구단주와 협의하에 예산에 맞춰 팀 편성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고 전력을 강화해 팀 성적이 중장기적으로 향상될 수 있도록 기능한다.


오클랜드 애슬레틱스는 최하위 팀이었다. 부자 구단이 있고 가난한 구단이 있다면 타구단과 비교가 무의미한 바닥이었다. 게다가 부자팀에게 유능한 선수도 빼앗긴 상황. 결승에 올라가고도 물을 먹은 빌리 빈(브래드 피트) 단장은 기존의 관점과 관습에 젖은 스카우터들의 태만함에 반기를 든다. 유능한 선수를 판단하는 기준이 바뀌어야 한다고 기술한 머니볼 이론을 통해 격한 변화를 추진한다. 언론에겐 흥미롭게 들렸지만 내부 반발은 높았다. 감독(필립 세이모어 호프만)마저 납득하지 못하고 현장에서 빌리 빈의 요구를 묵살한다. 늘 다른 선수를 내보내고 팀은 연패의 늪에 빠진다. 변화는 좀처럼 속도를 내지 않는다.


이를 악문 빌리 빈은 급기야 에이스들을 내보낸다. 이후 팀은 20연승을 거두며 메이저리그의 역사를 바꾼다. 기적처럼 보이지만 빌리 빈의 믿음과 의지로 계획된 일. 그는 자신의 트라우마를 떠올린다. 과거 명문대 전액 장학금 입학이 예정되어 있었다. 허나 야구에 있어서도 어느 하나 빠지지 않는 고교 특급 선수. 찾아온 스카우트는 금액을 제시하고 비전을 이야기한다. 그는 야구를 택했고 데뷔 이후, 7년 내리 부진한 성적으로 선수생활을 접는다. 야구를 떠나지 못했지만 그때의 기억은 단장이 된 이후에도 내내 떨쳐내지 못한다. 심지어 경기를 현장에서 조차 지켜보지 못한다. 좋게 말하면 제대로 꼬였고 나쁘게 말하면 실패한 야구인생. 재기하고 싶었다. “야구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으니까.


알면서도 본다. 선택-상처-기회-고난-극복-재기로 이어지는 야구 버전 현대판 영웅신화. 게다가 실화. 극적인 순간이 시시각각 펼쳐지는 야구경기의 현장감, 긴장이 느슨해질 때쯤 적시타를 날려주는 쾌감이 만만치 않다. 예측 가능한 스포츠 드라마에 호흡을 불어넣은 건 아론 소킨의 각본과 주조연의 안정적인의 포지션 때문이었다. 특히 페이스북의 창세기를 다룬 데이비드 핀처 감독의 영화 <소셜 네트워크>의 각본을 썼던 아론 소킨은 머니볼에서도 화력을 여실히 드러낸다. 스포츠든 인생이든 승패를 넘어 결국 즐겨야 남는 장사다...라는 뻔한 이야기를 신나고 찡한 장면들과 함께 기가 막히게 옮겼다. 그러고 보니 <카포티>의 베넷 밀러 감독 작품. 그는 이후 <폭스캐처>를 찍었다. 역시.


오래전 보고 기록한 이 글을 다시 꺼내 다듬은 건 29년 만의 엘지 우승 때문이다. 오랜 팬들의 격정적인 감정을 영영 알길 없을 것이다. 야구팬 지인이 그랬다. 지금 울다가 웃다가 하고 있다고. 오늘 우승 소식에 잠 못 이루는 분들은 아마 기다렸던 시간보다 더 오랜 시간 야구를 떠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야구도 떠나지 않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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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