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할 수 없다는 점에서
비극은 가족의 기본값.
어떤 조상이 먼저
시작했는지 몰라도
들짐승을 잡든 논밭을 갈든
공동 생존을 위해 뭉쳐 살았겠지.
서로의 노동력을 소중히 여기며.
원형을 다 알 수 없지만
가족에 담긴 정서적 의미는 학습의 결과.
가족의 가치를 체감하기도 전에
가족은 정말 대단히 좋은 거라는 긴 세뇌.
공교육과 매스미디어의 합작품인가.
그렇게 좋으면 미취학 아동일 때부터
혼례를 올리는 전통을 만들지 그랬어.
부모라는 유리한 지위에 있는 자들이
자식이라는 존재를 마치 별책부록 취급하며
자기 인생의 책임 바깥으로 날카롭게 밀어낼 때
그의 자식들은 태어난 이유도 모르고
벼랑 밑으로 떨어지며 아...
날 낳은 애들이 날 죽이는 거였구나.
영문 모르는 표정으로 뼈와 살이 분리된다.
남은 삶을 그렇게 누워 있어.
분리된 뼈와 살을 원래 형태로
조립할 수 없어서
제대로 직립하지도 못하고
지면과 충돌한 충격 때문에
기억과 인지, 사고능력도 온전치 않아.
아니 지금 대체 왜 내게 어떤 무슨
일이 생겨서 나는 남이 밟고
지나가도 가만히 있게 되었나.
너 엄마 없어?
너 아빠 없어?
너 고아야?
너 그럼 누가 밥 해줘?
너 집에 아무도 없어?
소리 내지 않아도
모든 말이 들리는 세계.
그 반대 역시.
시간이 흘러 먼지가 쌓여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고
뼈와 살이 엉겨 붙어서
처음 내가 어떻게 생긴 지 몰라도
숨은 쉬고 있어. 입은 벌리고
발을 떨고 음악을 들을 수 있어.
부모에게 폐기된 지
30년 정도 지나면.
그러다 어느 날 그들이 찾아오면
경비 아저씨에게 연락처를 남기고 가면
갑자기 30년 전 호칭으로 메시지를 보내면
물기가 마르지 않은 동공이 얼어붙는다.
생각의 방향이 모조리 가로막힌다.
잘못한 게 없는데 죄지은 사람 같은 기분이 든다.
드라마인지 뉴스인지 어디서 들은 건 있어서
접근 금지 명령을 신청해야 하는지 고민이 든다.
콩가루 가족사를 다룬 어느 웹툰이 떠오른다.
현실의 펀치는 처맞기 전까지는 강도를 알 수 없다.
그전에는 다들 비트겐슈타인인 척 말은 많지.
맞으면 알게 된다. 마치 등 뒤에서 폐로 칼이 들어오듯
아무 말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아주 오래전 자신을 버리고 떠난 사람이
집을 비운 사이 찾아왔다는 걸 알았을 때
지인은 아무 말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어딘 줄도 모르는
그 자리에서 한없이 정지상태가 되었다.
시간도 공간도 과거도 현재도 모두.
듣는 내내 나는 놀라지 않았어.
이런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되고 끝날지
아주 오래전에 겪어봤기 때문에.
물론 세상엔 예외라는 게 있겠지만
시시한 인간들 사이의 사건이란
기대한 만큼 드라마틱한 결말이 많지 않거든.
멍하니 앉아있으면
내 이름과 그 사람 이름이 적힌
엔딩크레디트를 볼 수 있어.
죽지 않으면 언젠가 만나고
죽어서 못 만나도 딱히 아쉽지 않은
어떤 가족은 그렇다.
행복과 불행으로 나눌 수 없는.
한때는 몹시 번거롭고 어지러웠지만
지금은 아무 감흥 없이 풍화된
흔적기관 같은 존재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