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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1 더 무비가 여성을 다루는 방식에 대하여

by 백승권

성공한 대중 영화에 대한 이런 관점은 대다수와 다를 수 있다. 하지만 분명 존재할 것이다. 케이트(캐리 콘돈)는 총괄 엔지니어지만 헤드셋과 엔지니어링 룸 안에서만 기능적으로 존재한다. 주인공 서사에 있어 고난 극복과 성장을 위한 하나의 역할로만 한정된다. 성공 공식의 완결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아쉽다.


나이와 코드가 다른 드라이버들의 팀플레이를 위해 커뮤니케이터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지만 심지어 모든 순간 폭발하는 속력의 에너지로 모든 것이 설득되는 트랙 위에서 비극적 사고로 완전히 잊힌 후 다시 등장하니 한물가고 노쇠한 이미지로 희화되는 남자 주인공의 여전히 살아있는 남성성을 증명하기 위해 추파를 던지고 성적 매력을 나누는 상대방으로 케이트가 하나의 클리셰가 되는 점은 감독의 전작 탑건 매버릭 때보다 더 퇴화한 부분이기도 하다. 사전 논의 과정에서 캐릭터 설정의 한계에 대해 인지한 내부자들은 클래식은 영원하다(여성 조연 캐릭터의 역할은 예전부터 이정도였다) 라는 변명을 이미 준비했을 것이다.


독립적인 존재에 대한 공감대 확보보다 단 한 명을 위한 도구로 남는다는 것은 앞으로도 제작될 블록버스터 영화의 공식에서 여성 조연의 역할이 이 정도 영역에서 답습할 수 있다는 우려를 들게 한다. 남성 주인공 원탑을 세우고 비중 있는 여성 조연을 배치할 때 위에 열거한 역할들에 한정될 수 있다는 점이다. 원하는 일을 하기 위해 안정적 지위 대신 새로운 모험을 택하고 그 대가로 남자 파트너(남편)가 떠나고 새로운 과거의 전설과 만나 사랑에 빠지고 각본의 한계인지 연기의 아쉬움인지 F1 더 무비에 대한 찜찜함이 케이트 캐릭터에 대한 이런 관점과 생각이라는 점을 제2의 성(시몬 드 보부아르)의 결론 파트를 읽다가 문득 떠올랐다. 다큐를 방불케 하는 생생함과 빈틈없이 짜인 치밀한 과거 극복 서사의 쾌감은 거부할 수 없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모두의 탄성에 묻혀 느껴지는 부분을 별거 아닌 척 넘어가긴 힘든 법이다.


하나의 영화가 흥행하고 망하고에 대한 우려가 아니다. 이런 영화의 영향력이 전 세대에 걸쳐 미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현상이 하나의 불가피한 영역처럼 받아들여지면 지금까지 싸워온 글로벌 대중문화 콘텐츠 및 스토리텔링 안에서 여성의 지위는 다시 흔들릴 수밖에 없다. 남성 히어로 서사에 익숙한 관객들을 위한 전략이라고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관객은 언젠가 죽어도 영화는 영원히 평가받으며 다음 세대에게 영향을 미친다.


곱씹어 보면 케이트는 여러 면에서 자기 역할에 남다른 탁월함과 집중력, 열정을 발휘하며 팀플레이와 승리에 기여하는 캐릭터였지만 역할에 주어진 비중의 한계 상 단편적이고 납작한 이미지에 머무른다. 모두가 리더와 히어로는 될 수 없겠지만 케이트에게 좀 더 개별적인 서사로 마무리되는 엔딩이 필요했다. 무려 총괄 엔지니어였으니까.



아래는 시몬 드 보부아르의 <제2의 성> 본문 일부.


여자와 남자가 평등하게 될 세계는 상상하기 쉽다. 왜냐하면 그것은 정확히 소비에트 혁명이 약속한 세계이기 때문이다. 남자들과 똑같이 양육되고 교육받은 여자들은 같은 조건에서 같은 임금을 받으며 노동할 것이다. 연애의 자유는 풍습에 의해 받아들여지겠지만 성적 행위는 더 이상 보수를 받는 ‘봉사’로 여겨지지 않을 것이다. 여자는 다른 생계 수단을 확보해야만 할 것이다. 결혼은 당사자들이 원하는 때에 즉시 해약할 수 있는 자유로운 계약 위에 성립될 것이다. 모성은 자유로울 것이다. 즉, 산아제한과 낙태는 허용될 것이고, 그 대신 여자들이 기혼이든 미혼이든 모든 어머니와 아이들에게 정확히 똑같은 권리가 부여될 것이다. 임신 휴가의 비용은 아이들을 책임지는 공동체가 지급할 것인데, 이는 아이들을 부모에게서 빼앗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부모들에게만 내맡기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다.

<제2의 성>, 시몬 드 보부아르


남자와 여자는 저마다 자기 방식으로 육체화한 실존의 기이한 모호성을 체험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들은 서로 맞서 싸우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각자 자기에 대항해 싸우고 있다. 즉, 자기가 거부하는 자기 자신의 일부분을 파트너에게 투사해서 그것과 싸우는 것이다. 자기가 처한 조건의 모호성을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대신에 저마다 그 비천함을 상대방에게 짊어지게 하려고 하며, 그 명예는 자신을 위해 남겨 두려고 애쓴다. 하지만 양자가 모두 진정한 자존심과 상관적인 명석한 겸손함으로 그것에 대한 책임을 감당한다면, 그들은 서로를 동등한 사람으로 인정할 것이고 우애 속에서 에로틱한 생활을 할 것이다. 인간이라는 사실은 인간들을 구별시키는 그 모든 특이성보다도 한없이 더 중요한 것이다. 주어진 조건이 우월성을 부여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고대인들이 ‘덕’이라고 불렀던 것은 ‘우리에 의해 좌우되는 것’의 수준에서 규정된다. 남녀 양성 속에서는 육체와 정신, 유한과 초월이라는 똑같은 드라마가 진행되고 있다. 남녀는 모두 시간에 잠식되고 죽음에 위협받고 있으며, 타자에 대해 똑같이 본질적인 필요성을 느낀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의 자유에서 똑같은 영광을 끌어낼 수 있다. 그들이 그 영광을 맛볼 줄 안다면 사이비 특권에 대해 더는 다투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 두 사람 사이에 우애가 생겨날 수 있을 것이다.

<제2의 성>, 시몬 드 보부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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