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백승권 Jul 26. 2018

오 루시! 나는 사랑 좀 하면 안 되냐?

히라야나기 아츠코 감독. 오 루시!






노랑 가발을 뒤집어쓰고 거울을 보며 조~온의 이름을 부른다, 가슴엔 비뚤게 달린 영어 이름. 루시가 된 순간 세츠코의 삶은 '각성'한다. 추레한 육신과 영혼이 '생체병기'로 돌변한다.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했던 사람, 세츠코(테라지마 시노부)의 정해진 미래는 뒤에서 욕이나 먹다가 가식적인 인사를 들으며 은퇴하는 할머니였다. 세츠코는 마지막까지 그녀를 모욕한다. 그리고 자살할까 봐 사과한다. 당장 죽어도 누구 하나 슬퍼하지 않을 삶, 선로 위의 시체가 되어 산자 들의 앞길에 걸리적거릴 게 뻔했다. 세츠코는 더 이상 세츠코로 살지 말아야 했다. 뜨거운 의지는 없지만 그렇다고 비참하게 죽긴 싫었다.

존(조시 하트넷)과 깊숙한 허그를 하기 전까지 세츠코는 워킹데드에 불과했는데, 이후 세츠코는 루시가 된다. 친언니(미나미 카호)에게 남자 친구를 빼앗긴 이후 이런 뭉클함은 처음이었다. 혼자 연애를 시작한다. 어떻게 보면 사기 치고 도망간 영어강사인데, 위치추적기라도 따라가듯 비행기를 덥석 타고 대양을 건넌다. 사라진 조카 미카(쿠츠나 시오리)를 만나러 간다는 그럴듯한 이유. 알고 보니 존은 미카의 애인이었다. 루시는 차에서 존과 섹스한다.

후회는 존의 몫. 루시의 연애감정은 증폭한다. 문신도 따라 그린다. 존은 거부한다. 루시는 고백한다. 자신을 안아준 남자, 루시라는 새 이름, 새 삶을 선물한 구원자. 존과 사랑에 빠져야 하는 모든 조건이 완벽했다. 밀린 모텔 월세는 잔고를 털어 내주면 그만이고 조카의 애인이라면 조카가 포기하면 그만이었다. 루시는 달려든다. 조롱받는 삶 속에서 존의 -의도된 매너일지라도- 존중은 동아줄이었다. 세츠코가 미래의 시체였다면 루시는 천국의 주인이었다. 루시는 자신을 막는 모든 행위와 격돌한다. 언니는 말할 것도 없고 조카와도 몸싸움을 벌인다. 조카는 존과 잤다는 루시의 말에 경악한다. 절벽 아래로 몸을 던진다.

루시의 삶은 세츠코 모드로 회귀한다. 존도 잃고 조카도 잃고 언니도 잃는다. 회사에서 잘리고 영원한 가해자가 된다. 짜증 나는 출근길에 밀치고 지하철 선로에 뛰어들었던 어떤 놈처럼 죽으면 끝나겠지. 나는 얻는 거 하나도 없는데 남들에게 평생 욕 처먹고 외면당한 삶. 그만 둘 용기 같은 건 필요 없었다. 숨 쉬듯 걸어가서 전차와 부딪히면 되잖아. 가해자로서 살아온 생 그만 둘 기회였다. 그곳에서 다른 가해자와 마주한다. 자식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중년 남자(야큐쇼 코지), 아내까지 죽고 후회를 들어줄 사람까지 상실한 존재. 세츠코는 그와 허그한다. 희망은 희희 망했다의 줄임말 아닐까. 한 몸으로 끌어안은 두 가해자 뒤로 지하철이 돌진하고 있었다.




이전 14화 블랙 미러, 연애의 미래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