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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승권 Nov 14. 2018

미쓰백, 굿빠이 월미도

이지원 감독. 미쓰백







국외 여행객들에겐 디즈니랜드, 잠실 가는 사람들에겐 롯데월드가 있다면, 남한 서울경기 지방의 상처 받은 사람들에겐 월미도가 있다. 월미도가 유일한 대안이었나 라는 질문엔 적당한 답이 떠오르지 않지만, 대다수의 한국영화에게 월미도란 어느 정도 바다도 있고 어느 정도 놀이기구도 있어 어느 정도 사람들이 소리 지르며 밝게 놀아도, 틈바구니 속에서 어색하게나마 그늘을 숨기고 같이 웃어도 괜찮은 곳이 되었다. 빈자들의 작은 판타지 월드, 꼬깃꼬깃한 돈을 꺼내 결제를 하고 솜사탕을 들거나, 갈매기들과 사진을 찍는다. 그곳에 미쓰백(한지민)도 방문했다. 쓰레기장에서 뒹굴다가 주어온 듯한 몰골을 한 어느 소녀(김시아)와 함께.


가끔 해외여행도 다니고 가끔 레스토랑도 가고 가끔 백화점도 가고 가끔 남들처럼 여유를 흉내 낼 수 있는 삶이었다면 월미도에 갔을 리 없다. 한국영화에서 월미도는 적당히 숨 쉴만한 이들이 가는 곳이 아니었으니까. 죽기 직전까지 발버둥 치고 도망 다니고 뒤엉켜 싸워야 겨우 숨을 내쉴 수 있는 사람들이 당장 죽는 것 대신 잠시 눈물 닦으려고 찾아오는 곳이 월미도였다. 미쓰백과 소녀, 백상아(한지민)와 김지은(김시아)도 그러했다. 엄마(장영남)가 죽이려다 버린 여자와 아빠(백수장)가 한겨울에 얼어 죽이려고 물을 뿌리고, 온몸이 빨갛고 파랗게 새까맣게 되도록 구타하고, 그래도 안 죽자 직접 숨이 끊어지기 직전까지 목을 조른 소녀였다. 둘 다 보호자가 필요했다. 백상아는 보호를 자처했고 김지은은 이런 백상아가 없으면 당장 죽었다.


타인이라면 지나칠 수 있었겠지. 한겨울 헐벗겨진 멍투성이 소녀 김지은은 백상아의 어린 유령이었다. 백상아의 현재를 온통 감아쥐고 있는 끔찍한 과거가 김지은이라는 완전한 형태를 지닌 인간이 되어 백상아의 눈앞에서 덜덜 떨고 있었다. 작은 손으로 손가락을 잡으며 가지 말라고 날 버리지 말고 제발 나를 두 번 세 번 죽이지 말아 달라고, 악마들에게 돌려보내지 말라고 애원하고 있었다. 타인이라면 뿌리칠 수 있었겠지. 혼자 살기에도 미칠 듯이 퍽퍽한 삶, 고개만 돌리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그게 가능한가. 그게 나인데. 과거의 내가 현재의 나에게 매달리고 있었는데? 호피 무늬 아우터를 걸치고 힐을 신은 백상아는 차를 세우고 뒤돌아 죽을 듯이 내달린다. 돌아간다. 애써 외면하려 했던 자기 자신에게로. 김지은에게로. 자신을 구원해달라고 눈물 흘리는 어린아이에게로. 세상이 모두 버렸던 어린 백상아에게로, 어른 백상아는 기어이 돌아간다.


백상아가 연장을 다룰 줄 알거나, 특수부대 출신이거나, 기억을 지운 인간병기였다면 두 남녀는 산채로 갈기갈기 찢겼을 것이다. 애써 상냥한 말투를 구사하고 교회에서 눈물 흘리며 기도하고 강아지를 (인간 어린아이 보다) 예뻐하고 밤낮없이 게임에 찌들어 살다가 눈이 닿는 거리에 쓰레기처럼 방치한 어린아이가 있으면 죽일 듯이 때리는 악마 새끼들. 원치 않는 임신으로 어쩔 수 없이 낳게 했으면서, 왜 태어났냐고 발광하며 소리 지르는 성인 사이즈 벌레. 나태한 공권력 앞에서는 한없이 피해자임을 자처하는 인간 미세먼지들. 백상아도 그렇게 될 수 있었다. 하지만 백상아는 그렇게 되지 않았고, 홀로 번민과 고통의 길을 택했으며 결국 자신과 닮은 생명에게 손을 내밀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백상아가 유전자부터 다른 인간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백상아는 오랜 인내와 자기 설득을 통해 벌레가 되지 않는 길을 택했다. 그렇게 스스로를 구원했고 김지은, 자신의 과거까지 구할 수 있었다.


형사 장섭(이희준) 덕에 그나마 다행이라고 여길 수도 있지만, 그나마 다행이려면 애초 엄마로부터 유기되지 않았어야 한다. 장섭은 관객이 백상아의 삶에 개입하고 싶은 욕망이 모두 합쳐진 실체였다. 그마저도 이름부터 서글픈 장후남(김선영)의 삶을 통째로 바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다. 장섭은 스스로 내려놓은 자가 선택할 수 있는 마지막 희망처럼 백상아를 대했지만, 장후남의 희생이 없었자면 장섭의 삶도 없었다. 약자가 약자를 세우고 그 약자가 다시 약자에게 손을 내민다. 다들 홀로 살기 바쁘지만 약자들은 어설프게라도 손 잡지 않으면 그대로 죽는다. 장후남은 그렇게 백상아와 보이지 않는 연대를 이룬다. 장후남이 키운 장섭, 백상아가 키울 김지은. 어떤 방식으로든 인간은 보호자가 개입되어야 한다. 백상아가 과거와 화해하고 미래를 지키는 동안, 장섭은 그림자가 되어 돕는다. 백상아에게 "엄마 되"는 삶을 이해못하며서도 숨어 독려하는 사람, 하지만 백상아가 되고 싶은 건 엄마가 아니었다. 모든 엄마가 곁에서 깨워주고 밥 주고 지켜주지 않는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까. 백상아는 어린 백상아에게 손을 내밀었을 뿐이다. 그렇게 악마들과 어린양 사이에서 자신을 구했다. 먼 훗날 너무 늦게 시체가 발견되는 삶이 아닌, 대박은 아니어도 꿋꿋이 같이 버텨낼 수 있는 삶을 선택했다. 미쓰백, 김지은, 두 명의 백상아가 롯데월드와 디즈니랜드에 가는 상상을 해본다. 굿빠이 월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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