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진 감독. 우상
가면은 경계다. 내가 되고 싶은 나와 원본의 나를 구분한다. 내가 되고 싶은 나는 남들이 원하는 나기도 하다. 남들이 원하고 그래서 내가 원하고, 다수의 욕망이 개인의 욕망으로, 욕망은 그렇게 우상화된다. 권력이 그렇다. 사람들에겐 어떤 상징적 인물이 필요하고 그에게 역할과 이상, 지위와 동경을 부여한다. 권력에 있어 가면은 필수고 가면 밖과 안이 다를수록 나는 점점 내가 원하는 남들이 원하는 내가 되어간다. 도의원 구명회(한석규), 나는 우상이 되어간다. 원본의 나는 사라지고 우상의 나만 자리 잡는다. 아들이 사람을 죽이면 (아들이 아닌) 아들이 사람을 죽이는 걸 본 사람을 없애면 된다. 그 과정 중에 아들이 죽더라도 어쩔 수 없다. 내가 우상이 되기 위해 어떤 방해 요소도 없어야 한다. 나는 나를 초월하고 모든 상식을 초월해야 다른 나, 우상이 될 수 있다. 나는 권력 자체가 되어야 하고, 이를 위해서 무엇이든 불사할 수 있다. 내 얼굴이 불타 일그러지더라도 상관없다. 만인들의 갈채 앞에서 우상이 될 수 있다면.
련화(천우희)에게 한국땅이란, 지옥에서 벗어나 필사적으로 도달한 도피처. 절망의 유일한 차선책이자 한 발자국만 잘못 디뎌도 명을 달리할 낭떠러지와도 같은 곳. 정착하기 위해 혼인신고가 필요했고, 혼인신고를 위해 짝을 찾고 식을 치러야 했다. 남편을 사랑했을까. 그건 가장 중요한 요소가 아니다. 내가 숨 쉬고 먹고 잘 곳, 밤새 불안에 떨며 쫓기지 않아도 될 곳, 짐승처럼 살지 않아도 되는 곳, 이것만 마련된다면 사랑을 증명하는 서류는 얼마든지 작성할 수 있다. 돌려보내지지만 않으면 된다. 여기까지 오기 위해 사람을 죽였다. 내가 살기 위해 개만도 못한 자식을 없애야 했다. 그런데 여기서 남편이 죽는다. 남편을 죽인 자들이 나도 죽이려 쫓아오고 있다. 나를 잡아 고문하고 다시 나를 세상에서 내쫓으려 한다. 상처 받은 사람들은 생존하는 법을 안다. 내가 이곳에서 뿌리를 내려 살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 나를 죽이려 한다면 같은 대우를 받을 각오를 해야 한다. 최소한 나와 같이 죽을 각오를 해야 할 것이다. 나는 살고 싶지만 죽도록 따라오는 지독한 절망을 끝내고 싶기도 하다.
아들이 죽는다. 누굴 죽인 들 돌아올 리 없다. 고통은 영영 끝나지 않을 것이다. 원망과 용서가 무슨 소용인가. 복수는 말이 없다. 대가리를 베어야 끝나는 일. 며느리라도 지켜야 한다. 아들의 마지막 순간을 지켜본 유일한 증인. 련화를 찾고 지켜야 한다. 그리고 원수의 그늘 속으로 잠입해야 한다. 아들이 죽으며 중식(설경구)의 인생도 같이 죽었다. 이제 남은 건 마음에도 없는 사과와 친절을 베푸는 악마들 뿐이다. 중식은 씻기지 않는 분노와 슬픔 속에서 느린 복수를 실행에 옮긴다. 모든 것이 늦었지만 가해자들이 가장 가까운 곁에서 숨 쉬고 있다, 그들이 가장 삶의 희열에 열광하는 순간, 거대한 모가지를 자르면 된다. 이것이 남은 삶의 유일한 계획, 아들에게 해줄 수 있는 최후의 배려.
우상은 물로 시작해 불로 끝난다. 물로 타인의 피를 씻던 가해자는 마지막 순간 불길 속에서 형체를 잃는다. 하지만 불은 가면까지 태우지 못한다. 그는 여전히 가면을 쓰며 가면 자체로 살아간다. 경외와 선망의 눈빛을 먹이 삼아 생명을 연장한다. 그에게 가족은 도구, 처음부터 오직 자신의 권력만이 생의 전부였던 자다. 이를 위해 모두를 먹어치울 수 있는 자다. 그가 스스로 우상이 되는 동안 많은 희생들이 뒤따른다. 죽음은 보상받지 못하고, 사건의 증인은 끝까지 지옥을 헤매며, 아들을 잃은 자는 고통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걸 원하고 그걸 거머쥐는 걸 성공이라고 정의한다. 성공 후엔 모든 과정이 정당화되고 필요악으로 규정된다. 거기까지 올라가려면 사람 죽일 수도 있지 뭐. 이런 인식은 법에 걸리지 않으면 괜찮다는 선에서 암묵적인 룰이 된다. 성공을 위해서는 어떤 것도 가능하다는 인식. 성공 이후의 내가 원래의 나와 얼마나 다른가. 개인의 작은 악은 욕망을 먹고 자라며 다수의 삶을 찢어 없애고 사회 질서를 교란시키는 거악이 된다. 앞서 '성공'이란 타이틀을 단 자들의 범죄 뉴스는 우상화의 조건이 죄라는 걸 끊임없이 주입시킨다. 마치 그게 공식이라도 된다는 듯이. 누구나 중식과 명회의 상황과 마주할 수 있다. 선택이 결과를 바꿀 뿐. 하지만 련화는 조금 다르다. 련화는 태생적 약자의 지위를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시스템 안에 결박되어 있었다. 누구를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죽게 될 수밖에 없는 삶. 련화가 살아 있었으면 좋겠다. 이렇게까지 절박하게 지옥을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쳤다면 조금 더 행복해도 된다. 자신이 이렇게 행복해졌다는 걸 느낄 기회를 얻어야 한다. 희생만 당하다 끝나는 삶이란 지켜보는 것조차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