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점이 떨어지길 바라며 연필을 깎는다

by 백승권

나를 기록하는 모든 일이 나의 잘못을 기록하는 일이 될까 봐 자주 망설였다. 기록된 모든 일이 잘못으로 기억될까 봐 과거가 잘못으로만 박제될까 봐 매번 창을 열지도 못했다. 고통과 슬픔이 과거 기록의 대표 키워드가 될까 봐, 지겨웠다. 고통과 슬픔이 없으면 글도 없구나. 과거도 기록도 고통과 슬픔이 원천이자 동력이라면 고통과 슬픔에 기생하며 살고 있었구나. 떨치지 못해 일부가 되었구나. 고통과 슬픔의 숙주가 되었구나. 불행해질 때만 글을 쓴다면 글 속에서는 내내 불행한 사람이 되어 있겠구나. 영화 속에서 슬픔과 고통만 발견하며 반가워하며 아 그래 바로 저게 나였어 반가워하며 영화를 쓰고 과거를 쓰고 고통과 슬펐다는 일기를 쓰겠구나. 숨겠구나. 도망치겠구나.

기록을 고발의 수화기로 삼는 일은 극심한 피로를 동반한다. 과거의 내가 현재의 나를 통해 미래의 내게 밀고한다. (이직 후 최근 몇 달처럼) 고통과 슬픔이 현저히 적은 일상 속에서 기록은 같이 현저히 적어지고 빈 종이와 꽉 찬 펜만 쥔 채 구석에 웅크려 기다린다. 어서 슬픔과 고통이 찾아오길. 그렇게 해야 입과 손을 떼고 비로소 나를 전시할 수 있을 테니.
폭력에 길들여지면 폭력을 기다리듯이 슬픔과 고통의 기록에 길들여지면 슬픔과 고통을 기다리게 된다. 하이퍼그라피(hypergraphia)를 위해 라이터스블록(writer's block)을 자처한다. 가해를 바라며 방어와 공격을 장전한다. 살점이 떨어지길 바라며 연필을 깎는다. 대체제를 찾아야 한다. 과거에 목 졸려 죽을 순 없다. 더 이상 자신이 누군지도 모를 무명의 사탄들에게 글감을 얻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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