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logue: 마침내 살아있음을 사랑하며
여행이 끝나고 돌아온 서울은 여행 이전과 대개 구별할 수 없이 똑같았지만 분명히 달라진 게 있었습니다. 제 마음이 가장 달라져 있었죠. 가기 전과 마찬가지로 후텁지근하고 목구멍을 죄어 오는 뜨끈한 여름 날씨, 어딜 가도 북적이는 서울의 지하철 역사 안, 조금만 핫한 동네를 가거든 밀려드는 사람들에 금방이라도 치일 것 같은 느낌……. 모든 게 여전했지만요.
이번 여행에서 가장 많이 느꼈다고 자부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건 바로 행운인데요. 마치 네잎클로버를 꾸준히 발견하는 듯한 느낌이었다고 해야 할까요. 한두 번 발견해도 신기하다고 해야 할 것 같은 그런 네잎클로버들이 곳곳에, 골목마다 저를 위해 기다리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어요.
행운이란 별거 아닌 것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겠죠. 이를테면 횡단보도를 건널 때 지체할 틈 없이 신호가 파란불로 바뀐다든가, 또는 외출해서 돌아다니기 편하게 날씨가 화창하다든가……. 횡단보도를 건널 때 파란불이 너무 나를 위해 맞춰 들어오는 듯하다는 느낌을 처음 느낀 건 베를린에서였던 것 같습니다. 그 뒤로는 정말 누가 미리 내가 오는 걸 알고 준비라도 해둔 듯이 그런 일이 자주 반복되었어요. 화창한 날씨는 어땠냐고요? 프랑크푸르트에 처음 착륙해 독일 땅에 발을 디딘 날부터 베를린을 지나 폴란드의 두 도시를 거쳐 다시 프랑크푸르트로 돌아와 한국행 비행기를 탈 때까지 제가 경험한 악천후는 굳이 따져보자면 만 하루쯤 되었던 것 같습니다. 아델 콘서트를 볼 때 부슬비가 조금 내렸고, 저를 허무하게 했던 문제의 아파트형 숙소를 지나 La Kaz로 터덜터덜 걸어갈 때 땅을 축축하게 적시도록 비가 내린 적도 있었죠. 그때를 제외하고는 모든 날이 눈부시게 아름답고 쾌청했습니다. 그동안 다녀 본 여행 중에서도 손에 꼽을 만큼이요. 신호등의 타이밍이라든가 맑은 날씨. 이런 건 누군가 의도하기 어려운, 자연적인 행운의 범주에 속하죠.
반면 제게는 누군가의 배려와 수고로움이 수반된 의도적인 행운들도 있었습니다. 그것을 세밀하게 짚어 말하자면 ‘호의’일 텐데요.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했을 때 번거로운 일이었을 텐데도 저를 공항까지 마중을 나와주고, 어둑한 시간 오르막길을 올라오는 게 힘들 거라며 제가 도착할 기차역 앞으로 데리러 와주고, 또 뤼델스하임에서 사 온 와인을 나누어 마시자고 내어주는 등등 프랑크푸르트에 머무는 내내 저를 챙겨 준 S 언니가 베푼 것도 굉장한 호의였습니다. 폴란드에서도 제가 도착하자마자 저를 맞아줄 수 있게 기차역에 미리 나와서 기다려주고, 머무는 숙소까지 데려다주고, 바르샤바에서 그다인스크까지 세 시간 반이 넘는 거리를 운전해 주고, 때로는 맛있는 한식집에 데려가 든든한 식사를 대접해 준 H 또한 제게 크나큰 호의를 선물해 준 것이었죠.
지인의 호의뿐 아니라 생면부지 타인의 호의 또한 많이 마주칠 수 있었습니다. 프랑크푸르트 Hauptwache의 한식집에서 만난 알렉산드라 역시 제가 맞은편 빈자리에 앉아도 되냐고 물었을 때 ‘안된다’고 잘라 거절할 수도 있었죠. 그 빈 자리를 흔쾌히 내어준 알렉산드라의 호의 덕에 저는 그와 함께 번아웃과 서울살이에 대해 논하며 풍성한 이야깃거리가 곁들여진 식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한국행 비행기를 탈 때는 어땠냐면요. 제가 짐이 많았잖아요, 정말 어깨가 부서질 것 같았거든요. 어깨가 산산조각이 나겠다 싶을 즈음 지친 저의 눈앞에 웬 카트가 보이더라고요. 저거구나, 나는 저기에다 짐을 싣고 끌고 다니면 되겠구나 했는데 인천국제공항과는 다르게 카트가 유료더라고요. €1를 카트와 연결된 기계에서 지불해야만 카트를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가진 현금이 하나도 없었어서, 카드로라도 결제하고 그걸 끌어야 하나 하던 찰나에 제 뒤에 부부로 추정되는 한국인 여성분과 독일인 남성분, 그리고 두 사람의 아이들이 등장했어요. 그러고선 여성분께서 카트를 사용하려는 것 같이 보이는 제게 물으시더라고요. ‘카트 쓰시려고요? 그냥 이거 쓰세요.’ 하시면서 반납하시려던 카트를 제 손에 그냥 쥐여주시는 거예요. 덕분에 저는 그 카트에 제 모든 무거운 짐을 싣고 이동해 공항 스타벅스에서 남은 대기시간을 유유자적 평화롭게 보낼 수 있었어요.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을 내리지 못하게 막을 수는 없어도, 우산이 없는 사람에게 내가 가진 우산의 일부를 공유해 빗방울을 막아줄 수는 있는 게 사람이잖아요. 이번 여행을 무사히 보낼 수 있었던 건 사람들의 이런 순수한 호의 덕분이기도 했습니다. 바닥난 지 오래라고 믿었던 인류애가 되살아나고, 세상살이에 가졌던 환멸감이 조금 가셨어요.
현금이 없어서 — 물론 공항 3층 도착 층에서 ATM으로 현금 인출을 해오면 됐었지만 — 공항철도를 탈 교통카드를 살 수 없었던, 한국행 비행기에서 빈자리를 사이에 두고 사이좋게 날아왔던 Eve에게 제가 여러 번거로운 프로세스를 거쳐 홍대입구역으로 향하는 1회권 교통카드를 선물해 줄 수 있었던 것도 제가 생명수처럼 여행 동안 받아 마신 호의들 덕분이었습니다. PayPal로라도 비용을 보내주겠다던 Eve에게 ‘Never mind, it’s my pleasure.’하고 손사래 치며 멋진 언니 코스프레를 할 수 있어 좋다는 생각마저 했던걸요. 지금 이렇게 베푼 호의가 민들레 홀씨처럼 날아가 어디선가 또 작게 꽃을 피울 테니 그것도 좋은 일임이 분명하고요.
올해 2월 초, 두 고과권자와의 휴직 면담을 모두 마치고 인사팀에도 통보한 그 시점에 부서에서 새로 합류한 분들과 함께하는 행사가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각자의 강점에 대한 리포트를 한 부씩 나눠 들고, 어떤 성향을 가진 사람이고, 어떤 강점이 있으며, 약점은 무엇이고, 이런 것들을 업무에서 어떤 식으로 발휘하거나 감출 수 있을지 논의해 보는 자리였죠. 물론 그것만이 유일한 행사의 목적은 아니었습니다. 부서에 새로 합류한 사람들이 많거나 신생 조직일 경우 서로 친해지는 게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에, 서로의 강점을 같이 확인하면서 서먹할 수 있는 사이끼리 서로 얘기도 해보고, 그 흔한 MBTI도 물어보면서 조금 더 알아가 보라는 의미가 오히려 더 컸죠. 당시 저의 휴직은 고과권자 두 분만 알고 있던 사실이었어요. 부서 분들께 오픈이 될 경우 ‘동요’가 일 수 있기 때문에 당분간 말하지 말자는 권고가 있어서였죠. 휴직을 이미 한 달도 남겨두지 않은 시점에서 제가 그 행사에 집중하기란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꾸역꾸역 자리에 앉아 졸지 않으려 애써 가며 시간이 빠르게 지나가기를 남몰래 빌고 있었습니다.
본격적인 강점 관련 논의가 이루어지기에 앞서, 아이스브레이킹을 위한 질문 카드가 주어졌습니다. 질문의 내용은 서로 깊이도 카테고리도 달라서 자기 카드를 오픈하기 전까지는 어떤 내용이 있을지 예측할 수 없었어요. 재미있게 본 영화를 말하라는 질문이 차라리 쉬운 축이었죠. 제발 어려운 질문만 나오지 마라, 나오지 마라……. 제 카드를 오픈할 때까지 열 번은 기도한 것 같아요. 그 어떤 신도 진심으로 믿어본 적 없어서였을까요. 제가 오픈한 카드 안에는 이런 질문이 쓰여 있었습니다.
‘살면서 꼭 이루고 싶은 목표는 무엇인가요?’
왜 하필, 이런 질문이 지금 제게 떨어진 것일까요. 삶의 모든 목표를 다 상실했다고 느끼던 그때의 제게는 조금 가혹한 질문이었습니다. 동시에 머릿속을 하얘지게 만드는 질문이기도 했어요. 살면서 이루고 싶은 목표? 그딴 거 없었거든요. 입술을 달싹이다가, 그 테이블에 앉은 일곱 사람의 열네 눈동자가 저만 바라보고 있는 게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졌을 때 저는 달싹이던 입술을 떼고 그렇게 말했습니다.
“저는요…… 잘 죽고 싶어요.”
열네 눈동자가 그렇게 말하는 저를 바라보다가, 이내 희한한 눈빛을 띠기 시작합니다. 솔직히 또라이 같은 답변이죠. 누가 회사 사람 앞에서 그런 말을 하겠어요. 심지어 질문이 ‘살면서’ 이루고 싶은 목표라고 했잖아요. 잘 죽는 일을 살면서 이루고 싶은 사람이라니. 테이블의 분위기가 일순간 숙연해졌습니다.
“제가 잘 죽고 싶다는 건요, 그니까 웰다잉(Well-dying)에 관한 건데요. 저는 솔직히 요즘 말하는 백 세 시대, 백 세 시대 그런 거 정말…… 정말 너무너무 부담스럽거든요. 아주 예전부터 생각해 온 건데, 저는 일흔일곱 정도면 죽고 싶어요. 그때 제가 계속 건강한 상태라면 존엄사도 검토해 보고 싶어요.”
그날 저와 처음으로 두 마디 이상 나눠 본 분이 그 테이블에 두세 명 정도 있었고, 나머지 분들도 사실 저와 아주 친한 사이는 아니었어서 몹시 당혹스러운 이야기였으리라 생각합니다. 물론 잘 죽고 싶다는 얘기를 하기 전에 저도 짧은 시간 많은 번뇌에 휩싸이기는 했었습니다. 그냥 ‘나이 들고도 발랄하게 사는 할머니’가 되고 싶다든가, ‘영어 마스터하기’라든가, 그런 구름처럼 붕 떠 보이거나 아예 땅에 두 발을 확 디딘 실리적인 걸 말할까, 그런 생각도 잠시 했었어요. 거짓말을 잘 못하는 성격 탓이라 그런지, 아니면 어쩜 3주 뒤에 휴직할 운명이어서 아무 말이나 싸지르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건지 모르겠지만 아주 이상하게도, 대충대충 아무거나 제 목표랍시고 말하는 걸 못 하겠더라고요.
너무 오래 살고 싶지 않다는 건, 어쩌면 이 치열하고 빡빡하고 퍽퍽한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그다지 이상한 바람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60세 정도 되는 정년을 다 채워 회사를 다니는 것마저 복으로 여겨지는 판에, 퇴직 이후 얼마 안 되는 연금이라도 수령하려면 또 몇 년을 기다려야 하잖아요. 그간 어렵사리 벌어 놓은 돈을 축내면서 말이죠. 그뿐인가요? 2030의 젊고 활기찬 육신이 언제까지 에너지를 유지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죠. 운동을 아무리 열심히 하더라도 — 심지어 저는 운동도 거의 안 한 채로 삼십몇 년을 이미 살아왔습니다만 — 젊었을 때의 몸으로 노인의 나이까지 사는 건 불가능한 일이죠. 만일 제가 낳은 아이가 있었다면 다른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이가 자라고 커가고, 또 그 나름의 인생을 사는 걸 최대한 오래오래 보고 싶어했을 테니까요.
테이블의 공기를 숙연하게 만들던 그때는 사는 것마저 지루하고 고통스러웠던 때였죠. 푸석푸석해진 얼굴, 더 이상 기대되지 않는 내일, 잠시 이틀 사흘 다녀오는 여행으로는 해갈되지 않는 어떤 깊고 묵직한 삶에의 분노……. 이런 재미없고 지루하고 지난한 게 삶이라면, 사는 게 꼭 축복은 아닐 수도 있겠다, 저는 그런 생각을 꽤나 자주 했었습니다. 돌이켜보면 그때 제가 더 먼저 가야 했던 곳은 휴직 면담 자리보다도 심리상담센터가 아니었으려나 싶네요.
프랑크푸르트 밥집에서 만난 알렉산드라에게 고백했듯, 제게 찾아왔던 것은 번아웃이었던 것 같습니다. ‘번아웃’이라는 말이 굉장히 많이 쓰이는 지금에도 저는 제가 겪는 게 번아웃임을 인정하기 어려워했어요. ‘나 까짓것이’ 번아웃일 수 없다, 그런 자조적인 반성이 그 이유였죠. 저는 야근이랑 거리가 먼 사람이었거든요. 집에 1분이라도 빨리 들어가려고 갖은 애를 썼었고요. 그러기 위해 밥을 거르고 남들 밥 먹을 동안 자리에 남아서 일을 해야 한다 해도요. 아주 다행히도 ‘우유 님은 어떻게 그렇게 많은 일들을 5시 30분까지 마치고 퇴근하셨었나 싶어요’라는 피드백을 최근에 사적으로 따로 만난 부서 분 — 저의 후임자 — 으로부터 듣기는 했지만, 고과 면담 같은 데서는 늘 ‘회사에 오래 머무르지 않는 것이 아쉽다’는 평을 들어왔었습니다. 회사에 오래 머문다고 해서 일을 잘하거나 열정이 있는 것만은 아닌데, 하고 억울해하면서도 내심 저 또한 제가 대단하지 않은 일을 대단하지 않은 열정으로 대충대충 해내고 있다고 생각했었는지도 모릅니다. 제가 생각하는 번아웃이란, ‘열심히 일한 사람이 소진되어 겪는 증상’이었거든요. 그래서 ‘나 까짓것이’ 번아웃일 수는 없었던 거죠. 와, 주책이다. 지금 이 말을 쓰는데 그동안에 제가 안타까워서 눈물이 조금 고이네요. 번아웃이 맞는데 그게 맞는지도 모르고 꾸역꾸역 버텼던 제가 너무 안쓰러워서요. 버스 안에서 우는 건 너무 주책이고 청승맞으니까 꾹 참아볼게요.
이번에 보름이 조금 안 되는 기간 동안 제가 다녀온 여행은, 그래서 몹시도 특별한 의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저는 여전히 일흔일곱에 고통스럽지 않게, 제가 결정한 그 시점에 죽고 싶지만, 이번 여름 여행을 다녀오며 이윽고 살아있음을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이죠. 만 10년을 꼭 채워 일한 회사에서 번아웃이라는 걸 얻고, 휴직하고서도 100일이 넘는 시간 동안 칩거하면서 한량처럼 살아낸 다음에야 디톡스라는 게 되고, 살아있음을 사랑해 보려고 일상을 잠시 떠나 있어 보면서요.
프랑크푸르트에서 S 언니와 깔깔거리며 회사도 까보고, 아델의 눈부시게 아름다운 음성을 제 두 귀로 직접 들어보고, 누구도 더 찾지 않는 뮌헨의 한가로운 내추럴 와인 샵에서 화이트 와인과 오렌지 와인도 마셔 보고, 다시 찾은 La Kaz에서 직원이 추천해 준 누들 볼과 와인을 페어링해서 먹으며 8년이라는 오랜 시간을 그 자리에 있어 준 La Kaz에 감사한 마음도 가져 보았죠. 베를린에서는 ‘나만을 위한 쇼핑 리스트’를 업데이트해 가며, 근사한 분위기의 레스토랑 야외석에 홀로 앉아 저무는 밤을 여유로이 만끽해 보기도 했어요.
바르샤바로 떠나서도 즐겁고 좋은 순간들이 많았죠. 덜컹거리는 살짝 낙후한 기차의 일등석에서 크루즈 여행을 떠난다는 중국계 미국인 자매와 대화하며 서로의 여행에 행운을 빌어줘 보기도 했고, 바르샤바에 도착해서는 H의 살뜰한 보살핌 속에 여러 국적의 맛있는 음식도 즐겨 보고, 구시가지 광장의 독특한 구경거리도 보고, 그다인스크로 넘어가서는 찬란하게 반짝이는 윤슬에 감탄도 했고요. 주황색 헬멧을 쓴 조그만 남자아이가 엄근진 표정으로 자전거를 배우는 걸 귀여워하며 사진도 찍었고, 윤슬이 반짝이던 바닷가 어느 벤치에 앉아 담소를 나누다가 서로를 의지한 채 일어나 걷기 시작하던 노부부의 아름다운 뒷모습도 보았죠. 커피와 칵테일을 마시며 레스토랑 야외석에 앉아 차양 사이로 들어오는 늦은 오후의 햇빛을 맞으며 재즈 공연도 즐기고, 쇼팽의 나라에서 커다란 공원 풀밭에 앉아 쇼팽 콘서트도 관람했죠. 곳곳에서 따뜻한 호의를 건네받으며, 마침 제 앞에서 네잎클로버처럼 켜지는 파란불에 때때로 감사해 가면서요.
마침내 저는 살아있음을 사랑하며 서울의 낮과 밤을 다시 이어 보내고 있지만, 살아있음을 사랑하는 일을 영원히 지속할 수는 없을 거라는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여행은 언제까지나 일상이 뒷받침될 때에야 가능하다는 것도요. 또 제가 손에 쥐었다고 생각한 이 행복한 감정이 하다못해 복직하는 그날, 모래알처럼 제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갈 수 있다는 것도요.
그럼에도, 저는 언제까지나 ‘살아있음을 사랑해 본’ 사람일 테지요. 그 경험에 기대어 산다면, 앞으로 제가 살아갈 몇십 년이 될지 모르는 삶은 그래도 퍽 살 만할 것 같지 않나요?
삶이라는 파도에서 이따금의 출렁임과 표류와 싸우고 계실 여러분께서도 언젠가는 저처럼 살아있음을 사랑하게 되는 순간을 맞으시기를, 그리하여 여러분의 삶을 기꺼이 껴안을 수 있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게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 단 한 번의 기적과도 같은 일이라 해도, 살아있음을 사랑해 본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는 분명 더 의미 있게 삶을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 말이죠.
이 글을 마감하는 시내버스 안에서 서울의 가을 햇살을 받으며, 지금까지 임우유였습니다.
24/10/23 (다시 한국식으로 돌아왔습니다.)
임우유 드림.
그동안 독일과 폴란드를 오간 저의 13박 14일의 여정에 함께 해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