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의 방식

더는 함께 나이를 먹을 수 없는, 보고픈 나의 친구에게

by 임우유
나이 서른셋이 되며 먹는 감정의 서른세 끼
#그리움



최선의

방식


 너는 내게 놀랍고 신기한 친구였다. 2012년 여름에 만나 출퇴근하듯 한 달의 교육기간을 채우며 꼬박 지켜본 너는 잘 웃고 목소리가 쾌활하지만 어딘가 내성적인 기운이 있어 보였던 동기생이었다. 내성적인데 밝고, 과하리만큼 모든 일에 열심이어서 신기했다.


 너와 같은 나라로, 반년 가까이 되는 시간을 보내러 가게 되었다고 했을 때 나는 내심 긴장을 했었다. 친해지긴 했지만 아직 아주 많이까진 아닌데, 잘 지내다 올 수 있을까 싶어 걱정이었다. 호기로운 마음으로 낯선 나라에 착륙한 너와 나는 공교롭게도 따로 살 집을 구하는 데 실패했다. 우리는 결국 남이 얻은 집에서, 그 집에 남던 방 하나를 갈라 사용하는 룸메이트가 됐다. 더 친한 친구가 될 거라는 복선 같았다.




 우리는 우리 외에 두 명의 다른 또래와도 친했다. 넷이서 누구 욕도 하고 각자의 고민도 나누고, 서로의 별명도 하나씩 지어줬다. 너의 몸을 많이 신경 쓰던 너에게는 영양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영양 씨, 하면 조금 거리감이 느껴진다는 이유로 우리는 너를 영양시라고 불렀다. 영양, 하고 부르면 이응이 가득 차 동그란 어감은 긍정적인 너의 모습을 닮아 부르기에도 부르는 기분도 좋았다.


 서울에서 두 시간 거리의 본가에 살았지만 영양시와 친구들을 만나러 나는 자주 상경을 택했다. 이십 대 중후반이라는 나이는 그냥 그렇게 쾌활하고 즐거워도 되는 것인지 의문도 갖지 않고 떠들고, 웃고, 헤어졌다. 만나면 늘 즐거웠고, 헤어지는 순간은 매번 아쉬웠다. 본가에 갈 고속버스를 타러 가야 했던 나는 여덟 시만 되면 모든 얘기를 중단시키고 지하철 출구 앞에서 손을 흔들며 헤어졌고, 만나면 허겁지겁 헤어지면서도 굳이 만나러 오는 내가 웃겨서 우리 넷은 깔깔거리고 웃었다.


 오래오래 갈 것이라 믿던 친목은 영원하질 못했다. 투명한 물에 탄 물감처럼, 우리 사이는 시간이 지나자 한 겹의 색조 변화도 없이 흐리멍덩해졌다. 영원할 것 같았던 넷의 고리는 모르는 사이 조금씩 부식되고 있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넷 중 하나가 원 밖으로 사라지고 남은 우리 셋은 그나마 서로를 의지하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조각을 잃은 퍼즐은 영영 완성되지 못한 채 한 구석이 계속 허전했다.


 사회로 나가 취직한 너와 나는 회사에서도 연결점이 있어 손쉽게 서로의 이름을 검색하고 재부재를 파악할 수 있는 사이였는데, 언젠가부터 나는 너에게 말을 거는 것조차 부담스러웠다. 말을 건네도 이전 같지 않은 친밀함으로 되돌아오는 답변이 가슴 아팠다. 말을 건네려다 말고, 건네려다 말고. 괜히 네가 좋아한다던 가수의 노래를 추천받는답시고 말을 걸어보기도 했다가 또 상심하고의 반복이었다. 너에게 하던 연락을 점차 줄였다. 안 그래도 심약해질 일이 많은 나를 보호하려는 일종의 방어기제였다. 마지막으로 작년 11월쯤 용기를 내어 연말에 셋이 한 번 보자고 했다. 너는 알겠다고 했다. 내가 만날 날을 잡지 않으면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날을 잡을까 말까 하다 만날 날을 정확히 묻는 일이 어려워 포기해버렸고, 눈치 없이 새해가 밝았다.




 지난달이었다. 비슷한 이유로 간헐적인 연락을 하던 동생, 남은 셋 중 하나이던 A에게서 연락이 왔다. 언니, 나 방금 영양 언니 소식이라고 문자를 하나 받았는데, 언니 이거 뭐야? 누가 장난치는 것 같아, 이거 거짓말이지? 말끝이 흐려지는 A에게 무슨 말이냐 묻는 내 말끝도 불안을 예감한 듯 여기저기 뭉개졌다. 네가 세상을 떠났다는 연락을 받았다고 했다. 거짓말 같은데 누가 이런 장난을 쳐, 하는 A에게 내가 찾아볼게, 회사 메신저에서 너의 이름을 덜덜 떨리는 손으로 찾았다. 이름이, 안 나왔다. 몇 주 전에도 말 걸까 말까 흘깃거리던 이름인데, 왜 이름이 안 찾아지지? 심장이 저 먼 벼랑 끝으로 뚝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분명 심장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이름이…. 안 찾아져.”


 우리 둘은 그날 오후 말을 잃었다.


 긍정할 죽음도 당연할 죽음도 없지만 예상이 도저히 안 가는 죽음은 있었다. 내겐 너의 죽음이 그러했다. 너는 남들의 두 배 세 배를 열심히 살았기 때문이었다. 여행을 좋아했고, 기꺼이 오지를 탐험했고, 오르기 어렵다는 거대한 산도 올랐던 너였다. 어머니를 모시고 여러 나라 돌아가던 효녀였고, 수영이니 요가니 운동도 참 열심히 했었는데.

 알고 보니 소식을 당장 전할 수 없는 사정으로 늦게 겨우 닿은 연락이었다. 조문 기간도 이미 지난 뒤였다. 너에게 마지막으로 손 흔들 기회조차 없었다. 이해가 가지 않아서 울고, 믿기지 않아서 울고, 너무 열심히 살던 네가 사라졌다는 게 어이가 없어서 울었다. 너처럼 온 시간을 빽빽한 정성을 채워 살던 아이를 떠나버려야 하는 게 삶이라면, 삶은 너무도 의미가 없는 것만 같았다.


 비정상적으로 슬픈 날 뒤에도 일상은 야속하게 이어졌다. 너를 잃은 것을 인지한 다음날에도 나는 똑같이 일어나 출근했다. 세상은 너무나도 똑같았다. 나는 여전히 대출을 갚기 위해 회사에 붙어 있어야 했고, 입꼬리가 굳어 잘 움직이지 않았는데 윗사람들 앞에선 아무 일 없는 사람처럼 굴었다. 네가 더 이상 세상에 없다는 것도 모르고 이미 십여 일이 지나버린 뒤였으니 놀라울 것도 없었다. 아무 일도 없이 똑같은 하루를 떠나보내는 퇴근길 버스에서, 바퀴가 굴렀다 멈췄다 하는 것이 그날은 유독 서글펐다. 네가 사라진 일상에서 나를 둘러싼 일과는 너무나도 반복적이고 똑같고 평온해서 미안했다.


 집에 와서는 쓸모없는 가정들을 한 움큼 늘어놨다가 다시 쓸어 담고 잠들기를 반복했다. 한 번만 더 말을 걸어볼걸, 네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도 글을 올리던 너의 블로그도 조금 더 기웃거려볼걸. 메신저에서 사라진 너의 이름을 장례식에 네가 머무는 동안에 어떻게 해서라도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하는 무력한 만약에들을.




 네가 떠나고 벌써 오십 일이나 지났다. 여전히 나는 오랜 시간을 들여 출근하고 퇴근하고, 싫어하는 상사를 몰래 노려보고, 맛있는 거 먹으면 좋아하고 불편한 사람들과의 식사에선 금세 체하는 일상을 산다. 네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아무도 묻지 않으면 너의 부재를 인지할 일도 딱히 없는 여전하고 지루한 나날들을.


 다만 너의 부재는 나의 일상을 재해석한다. 그럼으로써 존재를 강화한다. 벌써 몇 달이나 흘려 들었는데, 회사를 오가는 지하철 안내 방송에서 네가 다녔던 학교를 알려주는 소리가 얼마 전부터 쩌렁쩌렁 크게 들린다. 가만히 지하철 의자에 앉아있다가 맞은편에 안경을 쓰고 앉아 있는 여자를 보면, 우리가 죽어도 알아들을 수 없던 빠른 말로 안내방송이 나오던 그 나라 지하철에서, 화장기 없는 맨 얼굴에 안경을 쓰고, 어떤 행복한 기억이 숨어 있었는지 모를 휴대전화 스크린을 미소를 머금고 바라보던 너의 얼굴이 떠오른다. 아프리카는 네가 마지막으로 다녀간 대륙으로 가장 먼저 기억될 것이다. 데이식스 노래는 이제 데이식스 노래가 아니라, 네가 좋아하던 데이식스의 노래로 들릴 것이다.


 그리고 나의 이따금의 무력감은, ‘열심히 하고 싶지 않음’은……. 두 명 세 명분의 열심을 이고 지고 살던 너의 기억이 닿아 가끔 부서질 것이다. 너처럼 두 배 세 배 열심히 살진 못해도, 나 하나만큼의 열심은 가끔 무사할 수 있게. 너의 친구로 남아 사는 삶이 부끄럽지 않게.


  내가 너를 기억하는 최선의 방식으로.

  너를 보고 싶다는 말의 다른 표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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