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하고 만나러 올게

내일은 더 오래 살자

by 임우유
나이 서른셋이 되며 먹는 감정의 서른세 끼
#해방감



퇴근하고 만나러 올게,

내일은 더 오래 살자


 48.6kg. 167 정도 되는 신장을 가진 성인 여성이 갖기엔 너무 빈약한 체중이었던 때가 있었다. 40kg대라니. 초등학교 4학년 이후 가져본 적 없던 몸무게였다. 염증이 마음에 생기면 피부로도 올라오는지 그다지 좋지도 않던 피부에 온갖 트러블이 하루가 멀다 하고 났다. 자존감이 저 끝으로 떨어져 어디 갔는지도 모르게 될 무렵에 마지막 하나의 곁가지, 마지막 정차해볼 수 있는 갓길이라고 생각했던 터키로 6개월간의 인턴십을 하러 떠나버렸다. 터키에서 돌아와 이력서에 한 줄이 더 생겼을 때도 서류 합격은 녹록지 않았고, 실질적으로 터키에 다녀온 몇 개월의 타국 생활은 취뽀에 단 1g도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 나는 우여곡절 끝에 한 회사에 합격했다. 누구나 이름을 들으면 알 수밖에 없는 그런 큼지막한 회사에. 내 나이 스물여섯이었다.

 그 뒤로 딱 100일쯤 갔던 것 같다. 직장인이 되고 나서 내가 누렸던 취뽀뽕(?)이라는 것은. 100일. 신입사원 연수 때 누구보다 열심이었고 회사에서 어떤 포지션을 차지하며 나름의 성과를 내는 사원으로서 잘 성장할 줄 알았으나 현실의 냉엄함에 대해선 조금도 몰랐던 순진함이 버텨낼 수 있는 기간이었던 셈이다.

 사수도 이상했다. 사무실도 이상했다. 카드를 태깅하면 자동으로 스르륵 열리는 게이트를 드나들며 출퇴근할 줄 알았던 서울러 직딩으로서의 꿈은 본가에서 쳇바퀴처럼 출퇴근을 반복하며 무참히 조각났다. 이상한 성희롱들과 상상해보지 못한 성추행을 당하는 회식 자리에선 대놓고 이게 무슨 일이냐고 되묻지도 못했다. 야근해야 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 굳이 야근을 하고, 외근하러 다니면서 알지도 못하던 영업 현장의 닳고 닳은 갖은 아저씨들을 굽신거리면서 상대하는 사이 직장인으로서 내가 갖고 있던 일말의 자아라는 것은 작아지다 못해 소멸하는 듯했다.


 더는 영업의 현장에서 버텨내고 싶지 않았을 때, 내가 유일하게 존경했던 당시 나의 부장님께서 나를 서울로 밀어 올려보내 주셨다. 위축돼 있는 내 어깨가 안쓰럽다고, 맞는 일을 찾으면 더 잘할 텐데, 서울 가서 일도 바꿔보고 번듯하게 일어났으면 한다고.

 따뜻한 격려를 등에 업고 만 2년 만에 상경해서 일하게 된 사무실은 멋졌다. 그제야 내가 다니는 회사의 크기가 실감 났다. 멋지기만 하던 사무실이 일상의 사무실로 변모하고 엄청났던 감흥이 쪼그라드는 데는 일 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영업 현장이라면 어느 곳에서든 어느 누굴 만나든 어울리지 못하던 나는 부서와 직무를 함께 바꿨고, 제법 마음에 드는 일감을 만지며 직장인으로서의 하루를 다시 쌓아 올릴 수 있었다.


 회사라는 테두리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발견하게 된 것도 서울에서였다. 발명에 가까운 발견이었다. 알고 보니 본가에도 있던 독립출판의 현장을 가수이자 책방 주인인 요조가 계동에서 운영하던 책방무사에 들어가서야 처음 알게 된 것이었다. 뭐지, 이 신기한 세계는? 나도 책을 낼 수 있나 본데? 그걸 팔 수도 있나 본데? 심지어 그것들만을 취급하는 서점도 있구나. 이상한 설렘이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았다. 나도, 언젠가, 내 책을, 세상에, 내놓을 수 있겠다. 그 말이 현실로 들어와 ‘나의 첫 책’이라는 물성을 갖게 된 것은 책방무사에 처음 들어간 날로부터 천사백일흔세 번째 날이었다.


 독립출판물을 만난 날과 만들어낸 날 그사이는 글을 쓰고 읽는 경험으로 가끔은 빼곡하게, 가끔은 성근 밀도로 채워졌다. 요조와 이슬아의 글을 특히 좋아했고, 태재의 위트에 가끔 웃었다. 태재를 선생님으로 맞는 ‘에세이 스탠드’와 ‘에세이 드라이브’를 만나며 글을 주기적으로 쓰고 공유해보기도 했다.


 2020년, 코로나19는 내 정신과 영혼의 거의 모든 것을 앗아갔지만 글쓰기만은 빼앗아가지 못했다. 이슬아 작가는 《부지런한 사랑》에서 ‘계속 쓰는데 나아지지 않는 애는 없었’다고 했는데, 나의 글 역시 조금은 그런 것 같았다. 글을 시작하고 맺는 것이 덜 서툴러질수록 나는 조금씩 더 자유로워졌다. 슬픔을 글로 덜어내 옮기면 머릿속이 한결 가뿐해졌다. 마음의 묵직한 우울의 추가 화면과 지면으로 옮겨지는 동안 묻어있던 눈물도 조금씩은 말랐다.




 취미가 무어냐 묻는 말에 나는 요즘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글쓰기’라고 대답한다. 고루해 보인다는 상대의 눈빛을 가끔은 못 본 척하기 민망할 정도로 정적(靜的)인 취미인가 싶을 때도 있지만- 포기는 하지 않을 작정이다. 인생에서 한 번도 끈질기게 무언가를 이룬 적은 없지만, 내게 묘한 해방감을 선사하는 이 글쓰기만큼은 꾸준히 손에 쥐어보고 싶어서다. 퇴근하고서야 겨우 만날 수 있는 내 또 다른 자아, 글 쓰는 나 ‘임우유’를 가능한 한 자주 만나서 그날의 마감이 오는 순간까지 한껏 임우유로 숨 쉴 것이다.


 이 글은 여기서 끝나고 있으니 이제 글 쓰는 임우유에게 오늘의 마지막 인사를 한다.


 안녕, 넌 오늘 약 2시간 20분 살아있었어.

 내일 퇴근하고 또 만나러 올게.

 내일은 조금 더 오래 살자.



이 글은 쓰는 내내 눈물 참느라 힘 들이며 집으로 돌아오는 퇴근 버스에서 글의 대부분을 작성한 글입니다. 중간 부분에도, 마지막 세 문장을 쓰면서도 왜 이렇게 눈물이 날 것 같은지- 참 주책맞게 나이 든다 싶기도 했고, 그만큼 올 한 해가 정말 모두에게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지 싶기도 했고. 그 와중에 글쓰기로 일말의 구원을 받았다고 느낀 것만은 올해 수많은 불행 중 실로 귀한 다행이었습니다.

올해 브런치를 시작하면서 구독자 100명만 되면 진짜 좋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이 글을 발행하는 지금 구독자 수가 딱 102명이 되어 있네요. 제 지인 분들도 여럿 구독해주고 계시지만 대다수의 구독자 분들은 저를 오로지 글로 만나 뵙고 계신데요, 이 자리를 빌려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앞으로도 더 열심히 쓰고, 더 힘내서 보다 나은 글 쓰겠습니다. 험난한 시국에 모두들 건강만은 잃지 마시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