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히 행복한’
나이 서른셋이 되며 먹는 감정의 서른세 끼
#처량함
불행은 어제부터 찬찬히 쌓아 올려졌다. 한두 달 해오던 일이 몽땅 버블버블 수포로 돌아가버리게 됐다는 사실을 통보받고 얼이 빠져 있다가 겨우 출근했는데… 상황이 이렇게 됐는데도 아무런 수습 따위 할 수 없고, 그저 맥없이 받아들여야만 하는 상황.
점심땐 몇 달 전에 같이 이렇게 하자고 해서 이렇게 해오던 일에 대해서 처음부터 잘못됐다는 피드백을 들었다. 이렇게 하자고 말씀하신 장본인께서 그러시면 저는 어떻게 하죠…….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증거야 많았지만 들이밀 수 없다는 건 내가 더 잘 알고 있었다. 한참 동안 마음에서 뿜어져 나와 허공에서 흩어지는 책망이 너무도 덧없었다. 이런 날의 해답은 이른 퇴근밖에는 없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를 애초에 잘못 골랐던 게 화근이었다. 지난주 같은 요일, 같은 시간대에 탔던 버스가 종착지에 한 시간이 걸려 도착했던 기억만을 가지고 오늘도 엇비슷하게 도착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기대는 또각, 하고 부서졌다. 도착 시간은 예상보다 20분 가까이 늦어졌다. 버스에서 내리고 난 다음엔 한 번의 지하철 탑승과 한 번의 환승이 있었다. 환승까지 단 3m를 앞두고 열차 문이 닫혀버렸다. 빠른 하차를 위한 2-4번 열차 칸 앞에서 피곤유*가 뜬 얼굴로 나는 대책 없이 울어버렸다. 비말 차단 마스크로는 눈물까지 가릴 수는 없는 거였다. 눈물이 후두두 떨어지는데 가방 안을 뒤져 찾을 수 있는 휴지는 구깃거리는 휴지뿐이었다. 대충 그걸로라도 눈물을 훔쳤다. 지하철 안에서 지친 영혼으로 귀가하거나 이동하는 사람들 틈에 나 까짓것의 눈물 같은 건 보이나 마나겠지만.
점심부터 몰려온 스트레스 때문에 오늘은 자극적인 배달 음식에 맥주를 먹겠다고 선언하면서 사무실 문밖을 나섰던 터였다. 도미노 피자를 시켰다. 서른마흔다섯 가지 배달 업체 스캔을 마치고 겨우 고른 메뉴였다. 맛이 분명히 있을 것 같은 신메뉴를 주문했다. 30분 뒤 도착한다는 알림이 핸드폰 화면에 떴다.
‘죄송하지만 주문 건이 지연되어 80분 정도 소요될 예정입니다.’
허탈한 메시지가 떴던 건 마침 몇 분이 지나 놓쳤던 열차가 플랫폼으로 막 들어오려는 순간이었고, 주문한 지는 십 분이 지난 시점이었다. 80분? 30분의 배에 20분을 더해야 하는 시간이었다. 매장에 전화를 걸었더니 기본 주문 시간을 초과해 늦게 도착할 거라 80분으로 입력해두었지만, 실제로는 80분보다 훨씬 일찍 도착할 거랬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30분이랑 80분은 차이가 너무 크지 않은가요? 피자는 조리 중이라 떠 있었으니 취소 불가능한 상태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럼 취소도 안 되죠? 조리 중이라는 말조차 사실이 아니었던지 취소하실 수 있다는 답변이 들려왔다.
“그럼 취소해주세요.”
웃기지만 오늘 하루를 다 취소당한 느낌이었다.
모든 얘기를 전해 들은 반려자 친구는 내가 너무도 처참해 보였는지 황급히 이것저것 다른 옵션들을 내밀었다. 햄버거는 어때? 아니면 지난번에 거기는 어때?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오늘은 정말 도미노 피자가 필요한 날이었다. 집에 도착하기 3분 전, 반려자 친구는 피자만은 다시 주문하지 않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던 단골 배달 음식점에서 피자를 주문했다는 소식을 알려 왔다. 오 신이시여…….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집 대문 앞에 도착해 마지막으로 카드 키를 갖다 대는데 조막만 한 카드 케이스에서 카드 키가 끈과 분해돼 현관문 바닥에 파사삭, 하고 곤두박질쳤다. 와, 오늘 누가 나를 버린 거지, 이거는.
떨어진 카드 키를 주워들고 문을 다시 열고, 가방을 내려놓자마자 나는 엉엉 울었다. 운수 조진 날의 여정이 너무도 길고 험했다. 이런 날도 가끔 있는 거라지만 이 정도의 날은 이 나이가 돼서도 잘 감당이 안 됐다.
너무 좋거나 나쁜 날은 잊지 않도록 기록을 해두는 편이다. 이 기막힘을 잊지 않기 위해서다. 메모 앱을 열었더니 지난달 초에 시작했던 ‘행복한 순간 기록’ 메모의 앞부분이 보였다. 그마저도 너무 맥아리 하나 없이 지나가버리는 무기력함을 떨쳐내려고 억지로 시작했던 메모였는데. 9월 초쯤 가을바람이 살랑 불어오는 마을버스 안에서 조금 행복했던 것 같다고 써놓고 바로 다음 날은 ‘특별히 행복한’ 여섯 글자가 전부였다. 나는 그 문장이 어떻게 완성되는지 알고 있었다. 그 문장은 ‘일은 없었다’로 완성되는 문장이었다.
자기연민이 치밀어 오를 때쯤 그냥 한 번 그 여섯 글자를 되새겼다. 특별히 행복한, 특별히 행복한…….
다음번엔 저 문장을 다른 식으로 완성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니, 아니면 조만간 찾아올 어떤 하루의 감상이 그저
‘특별히 행복한’
그 여섯 글자로 완성된다면 좋겠다고도.
* 피곤유라는 것은 피곤(疲困)과 기름 유(油)를 붙여 제멋대로 만든 합성어입니다. 피곤한 얼굴에 동동 뜨는 기름 저만 있는 거 아니리라 생각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