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칭찬일까?
나는 ‘밥 잘 먹는다’는 칭찬을 인생 전반적으로 들으며 살아온 인간이다. 일명 ‘밥잘먹인간’
아마 인생에서 가장 자주 들은 칭찬은 '밥 잘 먹는다'일 것이다. 아마 태초의 기억은 엄마와 외할머니였던 것 같다. 양념이 잔뜩 묻은 경상도식 김치를 한 살 때부터 먹었다고 하니, 아무래도 그때부터 밥 잘 먹는다는 칭찬에 부응하기 위해 더 잘 먹어댔던 것 같다. 두 번째 기억은 할머니를 따라갔던 계모임에서였다. 시원한 계곡 옆 평상에서 닭백숙을 먹었는데, 6070 어르신들 사이에 미취학 아동이던 나는 인기 만점이었다. 작은 일을 해도 예쁨을 독차지했다. 하필이면 내가 닭껍질을 먹는 모습에 어르신들의 시선이 집중되었고, 기대에 부응하고자 느끼해도 꾸역꾸역 먹었다. 부담스럽지만 기분 좋았다.
가족이 아닌 타인에게서 들었던 첫 번째 기억은 초등학교 3학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피아노학원에 다니던 나는 '콩쿨'이란 것에 도전했다. 피아노 영재도 아니었으며, 콩쿨에서 입상한다 해도, 사실 기분 조금 좋아지는 것 외 좋을 것이 없는데, 왜 그렇게 하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5만 원이라는 (당시) 거금의 참가비도 있었기 때문에 엄마도 처음엔 회의적이었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체르니 책에 '장래희망은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라고 적어 다닐 정도로 진심이었다. 결국 미온한 엄마를 설득해 콩쿨에 나가게 되었다. 운명적으로 엄마의 모교에서 콩쿨이 열리는 덕에, 서울 구경까지 하게 되었다. 학원에서 잘 어울려 다니던 까무잡잡하고 예쁜 혜원 언니와 언니의 어머니도 동행했다. 언니의 어머니는 운전면허가 없으셨다. 30대 초반이던 우리 엄마는 SUV를 모는 멋진 여성이었고, 덕분에 넷이서 편하게 콩쿨로 갈 수 있었다.
콩쿨 장소에서 대여한 (조금 꽉 끼는) 분홍 드레스를 입고, 머리를 모짜렐라, 아니 모차르트 마냥 뽀글뽀글 소라빵 머리를 한 나를 보던 엄마는, 피아노 악보 상의 크레셴도와 디크레셴도를 몸으로 표현하면 좋을 것 같다고 주문했다. 소리가 작아질 때는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굽히고, 커질 땐 다시 고개를 피고 허리를 피라는 주문이었다. 기특하게도 악보의 모든 기호를 머릿속에 외웠던 나는, 심사위원들 앞에서 용감하게(!) 허리를 낮추어 소리의 줄어듦을 표현했고, 크레셴도일 때는 어깨를 펴 소리의 커짐을 표현했다. 엄마는 사진을 바로 인화해서 액자에 넣어주면서 말도 안 되게 비싸게 파는 아저씨에게서 사진을 샀다. 그리고 무대를 내려온 나에게 ‘역시 우리 솔이는 무대 체질이었어’라며 칭찬해 주었다. 엄마는 아직까지도 나에게 콩쿨 때 이야기를 한다. 내가 면접이나 발표 때문에 떨고 있으면, 엄마는 '콩쿨 때 사람이 그렇게 많은데 안 떨고 피아노를 치는 너를 봤을 때, 역시 우리 솔이는 무대체질이라고 느꼈다'며, 그러니 '이번 발표도 잘할 수 있을 거'라며 응원을 해주신다.
콩쿨이 끝나니 점심시간이었다. 점심을 먹기 위하여 엄마가 멀지 않은 과거, 그러니까 한 10년 전까지만 해도 대학생 신분으로서 다녔을 신촌 거리를 돌아다녔다. 맛집이란 개념도 없었던 2G 시대라, 엄마는 학생 때 자주 갔던 추억의 분식집 ‘다미’로 우리를 이끌었다. 긴장하느라 고픈 줄도 몰랐던 배가 고파왔다. 처음 먹어보는 서울 분식집의 맛에 나도 모르게 열심히 먹었나 보다. (특히 귀엽게 생긴 찹쌀 주먹밥이 인상 깊었다) 혜원언니의 어머니는 나를 보더니 '밥을 참 잘 먹어서 좋겠다'며, '혜원이는 밥을 잘 안 먹어서 걱정이야'라고 하셨다. 혜원언니는 키가 겅중하고 마르고 예쁜 언니였다. 반찬 투정이라던지 밥을 남기는 걸 잘 모르던 나는 언니를 잠시 측은하게 생각하곤 다시 식사에 집중했다. 이것이 타인에게서 들은 밥 잘 먹기에 대한 첫 칭찬이었다.
이후로도 종종 밥 잘 먹는다는 칭찬을 들었다. 너무 자주 듣다 보니, 언젠가부터 밥을 잘 먹는다는 게 불만이었던 적도 있다. 도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밥을 잘 먹었는지, 도대체 왜 나는 통통한 몸을 벗어난 적이 없는 건지 툴툴대자, 엄마는 나와 함께 심각하게 고민해 주었다. 엄마의 추리는 분유를 먹던 아기 때부터 시작된 것 아니냐는 것이었다. 연년생 동생이 있는 바람에 나는 금방 모유를 빼앗기고 분유를 먹었다. 둘을 동시에 먹일 수 없으니, 엄마가 동생에게 모유 수유를 할 때, 나는 아빠가 도맡아서 분유를 먹였다고 한다. 그리고 엄마보다 덜 섬세했던 아빠는, 내가 우유병을 빨다가 잠들면 그걸 빼지 않고 계속 먹게 했다는 것이다. 이 추론은 꽤 설득력 있다고 생각한다. 밥만 잘 먹을 뿐 아니라, 이 나이 먹도록 손을 물어뜯고 있는 나를 보면, 어쩌면 구강기에 머물러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뭐든지 입에 넣고 보는 거다.
가장 최근에 칭찬을 들은 건, 회식 자리에서였다. 프로젝트를 마친 기념으로 점심 회식에 나섰다. 신사동에는 정말 맛있는 매운 등갈비집이 있다. 가격이 사악해 개인적으로 먹기엔 많은 고민과 번뇌가 들지만, 법카라면 고민 없다. 항상 술보다 안주를 많이 먹는 나는, 얼마 전 막걸리를 마시고 오바이트를 해서 크나큰 전을(…) 만들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막걸리로 배를 채울 때 조용히 등갈비로 배를 채웠다. 이렇게 맵고 자극적이며 비싼 음식을 같이 먹을 사람이 없기 때문에, 회식일 때 질리도록 먹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살짝 얼큰해진 사람들이 대화를 주고받을 때 흰 밥에 주욱 찢은 등갈비와 콩나물, 양념을 두 숟갈 넣고 비벼 맛깔나게 말 그대로 챱챱 먹으며, 자연스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조용히 먹고 있어서 티가 안 날 줄 알았는데, 나의 이 조용한 만찬은 들켜버렸다.
'솔이는 진짜 맛있게 잘 먹는다.'
사회생활 중 듣는 '밥 잘 먹는다는 칭찬이 과연 순도 100% 칭찬일까' 잠시 의심이 들었으나, 나의 과거 선례를 보았을 때, 나는 객관적으로 밥을 맛있게 먹는 사람이 맞으니, 좋게 좋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밥 잘 먹는 사람 입장에서, 대체 왜! 밥 먹고 있는 사람을 보고 '밥 잘 먹는다'라고 말하는지 이해는 잘 가지 않는다. 그 시간에 밥 한 숟가락을 더 먹겠다!
유튜브에서 티브이를 보면서 밥을 먹느냐, 아님 아무것도 안 하고 밥만 먹느냐를 두고 실험한 EBS 다큐멘터리를 봤다. 티브이를 보면서 먹던 사람은 자신의 기준 이상으로 먹었고, 오직 밥만 먹은 사람은 금방 배가 불러 음식을 남겼다. 즉, 밥 먹는 시간이 너무 즐거워진다면, 내 기준보다 남는 양을 먹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밥 잘 먹는다는 칭찬,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정말 밥에 집중하고 있다는 것이니까 말이다. 밥 먹을 때 밥 먹고, 공부할 때 공부하고, 놀 때 놀고. 어쩌면 밥 잘 먹는다는 칭찬, 일 잘한다는 칭찬보다, 똑똑하단 칭찬보다, 예쁘다는 칭찬보다 더 뼈가 되고 살이 되는 칭찬일지도 모른다.
ps.
젓가락질 잘 못해도 밥 잘 먹어요 우르락끼-!
물론 나는 젓가락질 잘해서, 진짜 잘 집어서 많이 먹는다. 야후-!
주간 에세이 {이솔 올림}
인스타도 놀려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