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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림책 에이전트 Mar 29. 2020

출간 준비

노동의 시간

글 쓰는 게 좋아 잡지사에 들어갔고 글 만지는 게 좋아 출판사에 들어갔다. 육년 넘게 그렇게 글에 젖어 살았는데도 가시지 않는 근원적인 갈증이 있었다. 다양한 콘텐츠에 대한 당시 나의 식욕은 왕성했고, 더 많은 식단을 한번에 소화하고 싶었다. 아웃풋보다 인풋이 필요하던 시기였다.


도서저작권에이전트로 일하겠다는 계획은 사실 더 먼 미래에 있었다. 편집계를 은퇴한 뒤에, 좋은 작품들을 잘 솎아내 현장 후배들에게 던져주는 멋진 대모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미리 배워서 나쁠 게 뭐 있냐는 생각에 일단 에이전시에 입사했고 나의 먼 미래는 일순 눈앞으로 당겨졌다.


나는 사심으로 에이전시를 시작했다. 좋은 책들을 많이 보고 싶었다. 그리고 어차피 보는 김에 좋은 책들을 골라 출판사들에 소개하겠다는 마음이었다. 정성 가득 소개글을 작성했고, 시간을 들여 나의 감상을 덧붙였다. 이미 예상했겠지만, 사업은 그렇게 하면 안 된다. 내가 심혈을 기울여 타이틀을 고르고 만지고 프리젠테이션을 작성하는 동안, 저작권들은 팔려나갔다. 저작권 거래 속도는 매우 빨랐다.

올해로 편집을 한 시간과 에이전시를 운영한 시간이 같아지지만 나는 아직도 어떤 책이 잘 될 책인지 알지 못한다. 어렴풋이나마 느끼는 건 책과 출판사는 정해진 인연이 있다는 것이다. 나는 한 권의 책이 자기 인연을 잘 만날 수 있도록 가능한 자주 노출 기회를 제공할 뿐이다. 그럼에도 어려운 책들은 있다. 문화를 넘나들다보니 생기는 자연스러운 문제들이다.


서로의 이해가 필요한 지점들을 이야기로 풀어보면 좋지 않을까, 라는 질문을 이동중인 기차 안에서 했다. 책을 만들고 싶어 근질거리던 참이었고, 에이전시 운영에 돌파구가 필요한 시기였고, 나는 망하려던 참이었다. 잡지 발행은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한, 이 또한 사심 가득한 돌파구였다. 일년이 지난 지금, 피드백을 통해 어느 정도 목적대로 작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출판사들은 잡지에 실린 그림책과 작가 들에 좀더 호기심을 가졌다. 그 책을 번역 출간하는 데 우리 에이전시를 통하든 그렇지 않든, 그것은 대수로운 문제가 아니다. 나는 대의를 품었다.

아무리 이야기로 꾀어도 어려운 책들은 있다. 대표적인 예가 로저 올모스다. 이 작가는 타협하지 않는 철학으로 그림책을 만든다. 말하자면 그림책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느냐에 있어서 자기만의 확고한 철학이 있다. 로저는 그림책이 거짓말을 하거나 아름답게 꾸며내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그의 드로잉은 단숨에 책 안으로 독자를 끌고들어갈 만큼 강렬하지만, 솔직함이 국내 출간에 제동을 건다. 우리나라 출판 시장은 타문화권에 비해 굉장히 개방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단지 솔직하다는 이유로 출간이 어렵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 솔직함을 보여주는 미적 표현 방식에도 원인이 있을 것이다.


그의 책 중에서도, 가장 ‘거짓말하지 않은’ 책을 골라 출간을 시도하는 것은 모험이자 실험이다. 동물복지를 이야기하는 이 책을 두고 중간 입장은 없을 거라 본다. 빨려들거나 거부하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일년간 중개가 고사되었던 이 작품에 나는 빨려든 쪽이다. 나는 채식주의자도 아니고, 특별히 동물복지활동을 하는 사람도 아니다. 굉장한 육식주의자이고, ‘보호자’의 측면에서 동물을 바라보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편집없이 솔직한 이 책이 나 자신을 불러세웠다. 나는 여전히 인간적인 태도로 살아가(겠)지만, 이 책을 전후로 공존에 대한 의식이 다른 방식으로 움직이고 있음은 분명히 느낀다.


로저의 책을 준비하면서 시도하는 것이 또 하나 있다. 레이플렛 제본(미리보기: https://tumblbug.com/salon_p_1). 한국어판은 전 세계 번역판 중에서 가장 멋진 형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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