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하지 못한 질문들
회사에선 큰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었고 야근이 일상이었다. 사실상 삶과 일의 구분이 없었다. 비교적 일찍 퇴근하는 날에도 내일을 위해 일 생각을 했다. 퇴근 후에도 업무 메시지가 오곤 했다. 나는 서버 개발자였기 때문에 휴대폰에 오는 알림에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서버에 문제가 생기면 언제든 바로 대응해야 했기 때문이다. 메시지를 보낸 동료가 “나중에 보세요 지금 답장하지 않아도 됩니다.”라고 첨언을 붙여 놓았지만, 이미 내 머릿속을 휘저은 것은 돌이킬 수 없었다. 휴대폰이 없던 시절 워라벨(일과 삶의 균형)이 더 좋았으리라.
책 읽을 시간이 점점 없어지면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퇴근 후 녹초가 되어 집중력이 남아있질 않았다. 자연스레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SNS에 손이 갔다. 나의 삶은 그렇게 일 아니면 SNS로 채워져 갔다. 온전히 생각에 빠질 수 있는 시간은 쉽사리 주어지지 않았다. 삶을 살기 위한 일이 아니라 일하기 위한 삶이 된 것 같았다.
다행히 와중에도 꾸준히 독서모임은 참여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시간을 내 틈틈이 책을 읽었다. 주말에도 일에 대한 고민은 나를 완전히 놓아주진 않았지만, 책에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일에 대한 고민은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고민하는 이유는 일을 잘하기 위함인데, 일을 잘하는 것은 무엇을 위함인가? 연봉을 올리기 위해? 사람들의 인정을 받기 위해? 그 끝에는 뭐가 있지? 내가 하는 일이 사회에 도움은 되는 걸까? 답할 수 없는 질문들이 쌓여만 갔다. 뭔가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질문에 대한 답을 하지 못한 채, 일을 계속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온전히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결국 퇴사를 결심하고 동료들에게 말했다. 동료들이 여러 얘기를 해줬다. 한 동료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 커리어가 가장 중요한 시긴데 괜찮겠어요? 지쳐서 그래요? 조금만 쉬고 얼른 취직하세요."
또 다른 동료는 나보다 한 달 일찍 퇴사했다. 동료의 마지막 날, 배웅해 준 엘리베이터 앞에서 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지금은 우리 연차가 비슷하지만 나중에 돌아왔을 때, 저랑 연봉 차이가 나도 후회하지 않겠어요?”
나는 멋쩍게 웃으며 괜찮다고 답했다. 그 동료는 연봉을 많이 올려서 이직한 것으로 알고 있다. 나는 정말 괜찮았다. 당장 연봉을 올려준다 해도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그렇지만 이런저런 말들을 들으니 한 편으로는 걱정이 됐다. 개발자들의 몸값이 높아지고 있는 시기에 그만두는 건 어쩜 미친 짓 같아 보였다. ‘진짜 내 커리어가 끊긴다면? 지금 쉬는 게 맞을까? 돈을 많이 벌어야 하는데 아무 이득 없이 돌아오면 어떡하지..?’
그렇다 이때까지만 해도 물질적으로 성공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동료가 후회하지 않겠냐고 물었을 때 괜찮다고 답했지만, 그것은 정말 더 못 벌어도 괜찮다는 말은 아니었다. 더 큰 성공을 위해 단기적인 연봉을 포기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당시 마음 한편으론 이런 생각을 했다. ‘성장한 뒤 돌아와 더 많이 벌 거예요 두고 봐요'
‘빌 게이츠' ‘스티브 잡스’ ‘마크 저커버그'처럼 인문학적 소양을 갖추면, 높은 자리에 올라가 많은 돈을 벌 수 있다고 생각했다. 더 효율적인 사람이 되어 돌아오려 했다. 결국 나의 목표는 돈과 명성이었고 지름길을 찾고 있었던 것뿐이다. 독서모임 시작 후 1년도 더 지난 시점이었지만, 아직은 인문학을 돈벌이 수단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클럽장님과의 그 대화가 있기 전까진 말이다.
진행 중이던 프로젝트를 마무리하고 인수인계까지 끝냈다. 사용하던 책상을 정리하고 동료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4년간의 일터를 떠나니 마음이 시원섭섭했다. 폰에 연결된 회사 이메일 계정을 끊고 업무 관련 대화방을 모두 나왔다. 그런 행동을 했다고 해서 폰의 무게에 변화가 있는 건 아니지만, 내 손에 들린 폰은 어쩐지 이전보다 가볍게 느껴졌다.
일과 스마트폰에 치이는 와중에 틈틈이 해왔던 독서와 토론은 내 생각의 흐름을 막고 있던 댐에 작은 구멍을 냈다. 작은 구멍에 흐르는 물줄기가 결국 댐을 무너뜨리듯이 기존에 내 삶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댐은 무너졌다. 막혀 있던 생각들은 거침없이 흐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