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하 Nov 06. 2024

나도 같이 죽을랍니다 #18(완)

18. 반가워요, 구세주

그로부터 석 달이 지났다.


그 사이, 나는 다시 낙원고시원 206호로 돌아왔다. 김포시로부터 ‘의로운 청년상’을 받았고, 상과 함께 밀린 월세를 낼 정도의 상금도 받았다. 나는 다시 일상으로 복귀했고, 101번째 이력서를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확히 121번째 이력서를 썼을 때 한 기업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이석정 씨죠?”

“네, 맞습니다.”

“우리 부서에서는 특별히 석정 씨의 경험과 선행에 가점을 두고 특채를 하고 싶은데요. 지금 다른 데 합격한 곳이 있을까요?”


나는 곧바로 ‘아니요?’라고 말하려다가 꾹 참고 되물었다.


“왜요?”

“부회장님께서 뉴스를 보시고는 특별히 이석정 씨를 꼭 감사과에 두고자 하셔서요. 게다가 우리 회사와의 인연도 있고요.”

“귀, 귀사와의 인연이요?”

“우리 회사, 카드모집 일을 하셨지요?”


두 눈이 번쩍 뜨였다.


“한국카드인가요?”

“맞습니다.”


세상에, 한국카드 본사의 정규직 특채라고? 날고 긴다는 SKY 졸업생들도 가기 힘들다는, 게다가 감사과로? 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특별히 영업 경험도 있으니 현장도 더 잘 알 테고, 불법모집 행태나 사내 부당행위 같은 정보도 더 빠를 테고 말이지요.”


그 말을 들으니 다시 한번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더 지체하지 않고 답하였다.


“그렇다면 더 잘할 수 있습니다.”


나는 허공을 향해 꾸벅 절까지 했다.


“꼭 하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다음 주에 광화문 본사 7층으로, 9시까지 오세요.”

“네, 알겠습니다.”


나는 통화가 끝나자마자 제일 먼저 엄마한테 전화를 했다.


“엄마! 나 드디어 취직했어!”

“으이? 그게 정말이니? 아이고, 용왕님…”


엄마는, 늙은 인어처럼 울었다.      




한국카드 본사로 출근하기 전까지, 나는 주로 잠을 잤고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종종 그들을 만났다. 한 번은 방기순과 겨루기를 했고, 한 번은 나진언과 게임을, 또  한 번은 안수하와 손을 잡고 걸었다. 깨고 나서는 아쉬워하기도, 슬퍼하기도, 당황하기도 했다.


어떨 때는 몹시도 그들이 그리워 고시원에서 술을 기울였고, 어떨 때는 정작 약속을 어기고 방갈로에 나타나지 않은 것을 아쉬워했고, 어떨 때는 차라리 다행이라고 중얼거리며 혼자 씩 웃었다.


아, 딱 한번 주말에 송도의 ‘충신태권도’를 찾아가 보긴 했다. 방기순 아저씨가 궁금했다기보다는 마지막에 범인들과 잘 싸웠는지 혹여 다치지 않았는지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비록 반지하에 있는 도장이었지만 허리를 숙여 반쯤 열린 창문을 통해 들여다보니, 도장은 제법 넓어 보였다. 바로 그 앞에서 방기순이 흰 도복에 검은 띠를 차고 매서운 얼굴로 소리치고 있었다.


“발 태, 주먹 권, 길 도! 태권도란 말이다. 손과 발로 길을 여는 것이다. 바로 내 정신과 육체를 통일하고, 그리하여 내 사람들을 지키는 일이다. 다들 알겠느냐? 자, 두 다리로 단단히 주춤 자세를 하고, 따라 한다. 태!”


그의 구호에 따라 어린이들이 왼 주먹을 뻗으며 크게 소리쳤다.


“태!”

“따라 한다, 권!”


이번에는 오른 주먹을 뻗으며 소리쳤다.


“권!”


방기순이 한층 더 목소리를 높였다.


“도!”


아이들이 왼손을 더 높이 쭉 뻗었다.


“도!”


나는 딱 거기까지만 보고 일어섰다. 맞은편 ‘태성태권도’가 있던 자리에는 미용실이 들어서있었다.

 

웬즈데이는 여전히 TV에 나오지 않았지만, 불행 중 다행이랄까, 수하가 탈퇴했다는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 대신 머지않아 다음 앨범이 나온다는 소식이 돌고 있었다. 수하가 진언이를 품고 학생들에게 두드려 맞는 장면, 택시 앞에서 ‘나처럼 되기 싫거든, 친구에게 잘하라’고 외치는 장면이 담긴 영상들, 무엇보다 수하의 친구 선정 씨가 인터넷에 올린 사과문 등이 돌기 시작하면서 오히려 상황은 급반전하고 있었다. 또한 거리 곳곳의 광고판에서 여전히 수하는 눈부시게 웃고 있었다. 그로 미루어볼 때, 나진언 역시 수하의 후광을 받아 나름대로 잘 지내고 있지 않을까? 얼마 전에 SNS 팔로워 숫자가 만 단위를 넘어선 것도 확인했다.       

  

그들 또한 내 소식이 궁금할까? 어쩌면 내 소식을 뉴스에서 접했을지도 모르겠다. 신문지 꾸러미를 가슴에 품은 채 경찰서로 질주하는 모습. 할머니가 울면서 내 손을 당신의 얼굴에 부비는 모습. 그리고 김포시청에서 ‘의로운 청년상’을 받는 모습들.


그뿐만이 아니었다. 네티즌 수사대는 용케도 석 달 전 동인천역에서 자살하려는 남자를 구하고 사라진 의인의 영상을 구해서 내 모습과 똑같다며 방송사에 제보했다. 처음에 나는 애써 부인했지만 그럴수록 네티즌들은 내 움직임과 걸음걸이까지 분석해 가며 공론화했고, 급기야 목격자의 증언까지 더해지면서 나는 졸지에 ‘숨은 영웅’으로 더 주목받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출근을 딱 하루 앞둔 저녁이었다. 난데없이 핸드폰에서 카톡 알림이 울리기 시작했다. 혹여 특채가 취소되었을까 싶어 나는 벌떡 일어서서 핸드폰을 확인했다.


- 진솔한 언어님이 ‘석별의 정’님을 초대하였습니다.

- 진솔한 언어님이 ‘수요일의 여자’님을 초대하였습니다.

- 진솔한 언어님이 ‘방랑의 태권 전사’님을 초대하였습니다.

- 진솔한 언어님이 방제를 ‘무의도 방갈로’로 수정하였습니다.      

- 진솔한 언어 : 모두 잘 지내셨지요? 나, 진언이에요.

- 수요일의 여자 : 알지 그럼, 어제도 카톡 했잖아.

- 수요일의 여자 : 참, 다들 안녕하세요? 저 안수하에요.

- 방랑의 태권 전사 : 반가워요! 이렇게 다시 연락하게 되다니! 얍얍!

- 진솔한 언어 : 석정 형 TV 나온 거 봤어요.

- 수요일의 여자 : 나보다 더 유명해졌던데요? 부러워라.

- 진솔한 언어 : 형, 잊지 않았죠? 우리 약속?

- 수요일의 여자 : 하나. 우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 안에 이 방갈로로 돌아온다.

- 수요일의 여자 : 하나. 우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서로의 복수를 돕는다.  

- 수요일의 여자 : 하나. 우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한 날 한 시에 같이 죽는다.  

- 수요일의 여자 : 하나. 그렇다고 사람을 헤치거나 대중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  

- 수요일의 여자 : 하나. 그러나 위험이 생겼을 때는 서로를 지킨다.

- 수요일의 여자 : 조금 늦었지만 진언이랑 톡으로 방갈로 만들었어요.

- 진솔한 언어 : 참, 나는 엄마 따라 영국 왔어요. 지금은 아침, 거긴 저녁이죠?

- 방랑의 태권 전사 : 다들 건강은 하십니까? 석정 씨, 왜 답이 없어요?

- 진솔한 언어 : 형, 혹시 그때 우리 방갈로 안 돌아왔다고 삐짐?

- 수요일의 여자 : 그때 돌아갔으면 뭐, 이렇게 톡 할 일도 없었겠죠.

- 방랑의 태권 전사 : 나는, 나만 안 돌아간 줄 알았는데…

- 방랑의 태권 전사 : 어쨌든 석정 씨한테는 미안합니다.

- 방랑의 태권 전사 : 그런데 보고 계십니까? 숫자는 바로 없어지는데…

- 수요일의 여자 : 아잇, 정말 이러기예요? 보고 싶어요, 석정 씨…

- 수요일의 여자 : 사과할 것도 있어요. 사실, 그 알약, 아스피린이었어요.

- 방랑의 태권 전사 : 엇? 정말이에요? 실은 나는 몰래 다시 뱉었어요.

- 진솔한 언어 : 나는 맛보고 딱 알았는데 ㅋㅋㅋ     

- 석별의 정님이 밖으로 나갔습니다.     


나는 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몇 번이고 눈물이 떨어진 액정을 박박 문질러야 했고, 그저 다시는 이들을, 서로의 마지막 히든카드를 잃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러다가 뭔가를 잘못 눌러 밖으로 나가 버리고 말았다.        


- 진솔한 언어님이 석별의 정님을 초대하였습니다.      

- 수요일의 여자 : ㅋㅋㅋㅋ 다 알아요, 훌쩍이다가 ‘나가기’ 누른 거.

- 방랑의 태권 전사 : 석정 씨가 먼저 나갈 사람이 아니지요.     


나진언은 이렇게 덧붙였다.     


- 진솔한 언어 : 형, 어디 갈 생각 말아요. 알죠? 카톡감옥?^-^v     


그리고 나는 이렇게 답했다.      


- 석별의 정 : 그날, 나도 안 돌아갔거든요? 걍 달나라로 가버렸지.     



     

한국카드 감사과에 출근한 지 다시 석 달쯤 지났을 때, 나는 광화문지사 2층을 찾아갔다.


카드 모집인들은 영업을 위해 주로 밖에서 활동하기에 아직 구세주를 마주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월말에는 결산 때문에 종일 사무실에 붙어있어야 했기에, 나는 때를 맞추어 그를 찾았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구세주는 여전히 양손 검지를 세워 자판을 탁, 탁 치고 있었다.


“누구… 시지요?”

“저 벌써 잊으셨습니까, 팀장님?”


구세주는 조심스레 나를 올려다보더니 피식, 웃었다.


“이석정? 뭐 이제 와서 나한테 하소연이라도 하려고 왔나?”

“하소연이라니요, 옳고 그름을 따져보러 왔지요.”    

“무슨 옳고 그름? 뭘 어떻게?”


나는 '한국카드 감사과 이석정'이라고 적힌 사원증을 그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그거야 뭐, 이제부터 찬찬히 들여다봐야겠죠.”


구세주의 얼굴이 옥토끼처럼 하얗게 질렸다.        



        

끝.  




연재 후기.


사실 이 소설 속의 인물에는 각 시기별 제 모습들이 담겨있습니다. 아마 저뿐 아니라 누구나 한 번쯤은 '살아갈 결심'을 해보셨을 것입니다. '죽을 결심'이 아닌 '살아갈 결심' 말이죠. 매 순간 고통과 상처를 이겨내고, 혹은 외면하면서 조금씩 나아가고 또 한 뼘 성장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 아닌가 싶습니다.


저는 지금도 개와 늑대의 시간에 '기순'의 태권도장을 기웃거리거나, 녹화장 뒤에서 가만히 수하의 노래에 귀 기울입니다. 모르는 척 진언에게 DM을 보내거나, 카페에 앉아서 노트북을 두들기다 석정이 바지런히 뛰어다니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봅니다.   


'잘 지내고 있지?'


물어보면, 그들은 다만 자신의 자리에서 반짝입니다.


저도 그렇게 저의 자리에서, 한 글자, 또 한 글자를 써 내려갑니다. 이것들이 더 많은 이들에게 별자리가 되어주기를 소망해 봅니다.  


이제 막 긴 여행이 끝난 만큼 한동안 나무늘보처럼 어슬렁거리다가, 머지않아 더 다듬어서 책으로 다시 뵙겠습니다. 지금까지 <나도 같이 죽을랍니다>를 읽어주신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이전 17화 나도 같이 죽을랍니다 #17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