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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하 Oct 26. 2024

나도 같이 죽을랍니다 #16

16. 의로운 청년이라뇨?


“네에?”


방기순이 깜짝 놀라 몸을 움츠렸다.


“아직 석정 씨 복수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나진언도 놀란 얼굴로 말했다.


“누나, 오늘 친구 분이랑 만난 거, 힘들었어요?”


안수하가 말했다.


“오히려 그 반대랄까? 원래는 죽지 않고는 하루도 버티기 어려웠는데, 벌써 이틀째, 그리고 내일이면 사흘째 버티고 있는 걸?”


지금 이 순간, 내 머릿속에는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근데 왜 이 약을…”   


차라리 방기순의 말마따나 내 복수가 끝나지 않았음을 내세워 성을 내볼까도 싶었다. 아니, 모든 게 실패로 돌아간다면 지금이라도 경찰에 신고를 할까 싶었다.


“석정 씨 눈동자 떨리는 거봐.”


안수하가 장난기 어린 눈으로 웃었다. 내가 정색하고 물었다.


“이 약은 뭡니까?”

“우울증 약이에요.”

“네?”

“신기하면서도, 가장 슬픈 게 뭔 줄 아세요?”

“뭔데요?”


바닷바람에 이어 그믐이 방갈로로 스며들고 있었다. 안수하는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세상이 끝난 거 같아 너무 괴로워서 한 번은 유명 정신과를 찾아갔어요. 그런데 의사가 별다른 상담도 해주지 않고 다짜고짜 이 약을 처방해 주더군요. 처음엔 화도 나고 황당했어요. 나는 누가 내 얘기를 들어줬으면 했는데, 그래서 내 마음을 다독여줬으면 했는데, 그분은 그저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다가 적당히 말을 끊더니 이 약을 먹어보라고 하더군요.”


나진언이 물었다.


“그래서 먹어봤어요?”

“처음에는 그냥 방에 처박아두었지. 꼭 의사한테 놀림받는 거 같아서 열이 받기도 하고, 갑자기 더 비관적인 생각이 들어서 죽을 거 같은 거야.”

“공황장애? 누나도?”


안수하의 눈이 커졌다.


“진언이 너도?”

“그럴 때는 내가 폭발해 버릴 거 같아요.”


안수하가 가만히 나진언의 손을 잡았다. 이번에는 방기순이 말을 이었다.


“나도 처음에는 몇몇 연예인들이 TV에서 공황장애 얘기하는 걸 듣고는 안 믿었어요. 왜 갑자기 숨이 막히고 죽을 거 같은 기분이 드는지, 운동선수로서 이해가 가지 않았거든. 그런데 도장이 망했을 때, 누군가의 위로와 응원이 간절할 때, 아내가 이혼서류를 내밀자 갑자기 내 속에서 사이렌이 울리더군요. 그때 알았소. 내가 멈추려고 해도, 마치 자동차 경보음처럼 멈추지 않는 발작이랄까?”


안수하가 말을 이었다. 그녀의 왼쪽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바닥이 없는데 계속 떨어지고 있는 기분? 그런데 더 비참한 건, 어떻게 방법이 없다는 걸 알고 온몸이 터질 거 같아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이 약을 먹었는데…”


안수하의 오른쪽 눈에도 눈물이 흘렀다.


“갑자기 내 안의 경보음이 멈추고, 누가 머리에 풍선을 매단 것처럼 기분이 좋아지는 거예요. 그때 알았어요. 우울증이 지속되면서 내 머릿속의 어떤 호르몬 분비가 고장이 났고, 이 약이 그걸 조절하고 기분을 좋게 하는 호르몬을 분비시킨다는 걸요.”


방기순은 믿기지 않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나를 자살까지 생각하게 만든 요인들이, 결국 내 머릿속에서 분비된 호르몬 때문에 좌지우지된다고요?”

“웃기죠? 그리고… 슬프죠?”


그제야 나는 안수하가 저 약을 우리에게 내민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안수하가 말을 이었다.


“처음에는 이 약에 의지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이 약이 듣지 않았어요. 그때부터 어떤 사람들은 프로포폴을 맞거나, 마약에 손대기도 했죠. 저는 자살카페를 뒤지기 시작했고요.”


내가 물었다.


“그래서 수하 씨는, 오늘밤 우리가 이 약을 먹어보고 내일 일어났을 때, 그래도 죽고 싶다면 정말 같이 죽자는 말씀이십니까?”


안수하의 제안은 오히려 긍정적으로 생각할 여지가 있었다. 안수하는 분명 어제오늘의 사건에서 작은 희망을 보았을 수도 있다. 그게 아니라면 완전한 절망 속에서 마지막으로 완전하게 죽을 명분을 찾고 있거나. 안수하가 내민 약은 전화위복이 될 수도 있고, 쐐기가 될 수도 있었다. 나는 전자라고 믿고 싶었다. 그와 동시에 다른 사람들의 반응도 살폈다.


“흐음…”


방기순의 눈동자는 떨리고 있었고, 나진언은 다시 자리에 앉아 벽에 기댄 채 생각에 잠겼다.


“뭐 궁금하긴 한데요. 얼마나 기분이 달라지는지.”


나진언이 호기심을 보이며 안수하의 손에서 알약 하나를 집어 들었다.


“까짓것 한번 먹어봅시다. 이깟 약 하나가 생각을 바꿀 수는 없을 거라 확신하지만 말이요.”


방기순도 이내 그것을 집어 들었다.


“흐음…”


막상 그들이 약을 먹기로 선택하니 오히려 나는 고민이 되었다. 바로 이 약의 부작용 때문이었다. 어떤 약리적인 부작용을 걱정하는 게 아니었다. 내가 볼 때 분명히 이들의 상황은 좋아지고 있었다.


방기순은 아내에게 폭풍 잔소리를 들었지만 진심을 듣게 되었고, 아들의 목소리도 들었다. 또한 오랜 숙원이었던 사람과 겨루어 이겼고, 덕분에 진짜 태권도를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의 전화 문의가 들어온다고도 했다.   


나진언은 비록 일진들을 두들겨 팬다는 계획은 실패했지만, 안수하를 친누나처럼 의지하면서 처음으로 그들에게 달려들었고, 오랜 시간 묵혀둔 분노를 쏟아낼 수 있었다. 게다가 간간히 옆에서 지켜본 바로는 웬즈데이 수하가 그의 사촌누나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녀석의 SNS에 팔로잉 신청이 쇄도하고 있었다.


안수하 역시 비록 학폭 논란으로 그룹의 해체위기에 처해있지만, 가장 아꼈던 친구와도 화해했고, 비록 이틀에 불과하지만 어릴 때 남동생을 연상케 하는 나진언을 보살피면서 삶에의 의지를 되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나진언을 통해 들은 바로는 아까 학교에서 그녀가 했던 말들이 곧바로 인터넷에 퍼지면서 여론이 긍정적으로 돌아서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그믐을 머금은 안수하의 눈동자를 보며 조금 알 것 같았다. 어쩌면 안수하는 지금 이 순간 마음 한쪽에서 슬금슬금 올라오는 한 줄기 희망 때문에 더 불안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행여 다시 무언가를 기대했다가, 그 무언가마저 사라져 버리면 그때는 정말 어떻게 할까.


그제야 나는 사람들이 자살카페를 통해 여기 모인 이유를 아주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 이들이 알약을 받아 든 이유와, 그것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까닭도. 뭐 이 또한 나 혼자만의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만 생각하기로 하고 안수하에게 대꾸했다.


“나는 일단 괜찮습니다.”


방기순은 그것을 입에 털어 넣었다.


“뭐 그래봤자 약인데요.”


나진언은 묘한 표정을 짓더니 안수하에게 말했다.


“뭐 이게 우울증 약이 아니라, 죽는 약이라도 상관없어요. 나는 그냥 누나 따라갈래요.”


안수하는 나진언에게 짠한 눈빛을 보내더니 바로 알약을 입에 넣었다. 나진언도 지체하지 않고 약을 삼켰다.


나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상황을 정리했다.


“이제 잘 시간입니다.”     




다음날 김포의 한 거리. 나와 방기순은 나진언이 알려준 행복빌라 앞에서 새벽부터 잠복했고, 피싱 운반책으로 예상했던 차림의 청년이 나오는 것을 보았다. 나는 조용히 속삭였다.


“검은 모자에, 검은 스포츠가방 맞죠?”


우리는 일단 숨을 죽인 채 그의 뒤를 밟았고, 방기순은 급히 핸드폰으로 어디론가 문자를 보냈다. 가까운 읍내 PC방에서 나진언과 안수하가 새로 확보한 정보들을 계속 알려주고 있었다.


“제보된 글들을 헤집어보니, 검은 모자, 검은 스포츠가방 맞다는군요.”


방기순은 수시로 문자 메시지를 확인하며 앞장서서 그를 쫓았고, 나는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여 주변을 살폈다. 어찌 보면 우스운 상황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방기순은 이번만큼은 같은 자살 멤버(?)인 나를 제대로 도와주고 싶어 했고, 이렇게 된 이상 나도 엄마가 당한 보이스피싱 범죄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놈들에게 되갚아주고 싶었다.


‘어차피 경찰들은 사실상 잡기 어렵다고 했으니까…’


차라리 직접 나설 수밖에 없었다고 할까. 나 혼자서는 결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얼마 남지 않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빨리 걷는 방기순의 뒤통수를 보았다. 모든 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저기, 저 할머니, 이상하지 않습니까?”


방기순의 말에 나는 한 건물 뒤에 숨어 그쪽을 살폈다. 검은 모자를 쓴 남자는 이내 주위를 살피며 누군가를 기다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허리가 구부정한 할머니가 무언가를 거듭 싸맨 꾸러미를 안고 나타났다. 할머니는 남자를 발견하자마자 다짜고짜 눈물을 쏟았다.


“아들이 참말로 납치되었답니까?”


그 말을 듣자마자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틀림없이 엄마한테 쓴 수법과 같았다.


방기순이 거칠게 숨을 내쉬는 나를 보고 슬쩍 팔을 잡았다.


“진정하시지요.”


검은 모자를 쓴 남자는 별말 없이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할머니가 울먹이며 남자에게 꾸러미를 건네고는 두 손을 모아 빌었다.


“제발 도와주세요, 검사 선생님, 제발 구해주세요. 우리 아들을…”


방기순은 먼저 그 모습을 핸드폰으로 촬영했다. 그러나 나는 더 지체할 수 없었다. 이대로 저놈이 꾸러미를 손에 넣는다면 어디로 튈지 알 수 없으니까.


“일단 돈뭉치부터 확보하고요.”


나는 그대로 달려 나갔다.


“저기, 석정 씨!”


방기순이 당황하여 나를 잡으려 했지만, 나는 이미 놈에게 달려들어 꾸러미부터 가로챘다.


“아이고, 이놈은 누구냐! 네놈이 내 아들 잡아갔느냐! 이노옴!”


할머니가 울부짖으며 소리쳤고, 갑작스런 내 행동에 놀란 남자는 잠시 주변을 살피더니 인적이 드문 것을 확인하고는 품에서 칼을 꺼내 들었다.


“어서 내놔!”


나는 칼을 보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분명히 나진언은 대다수의 운반책들이 평범한 청년들, 학생들, 취준생이라고 했다. 그러나 놈의 움직임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이 와중에도 CCTV의 위치까지 빠르게 일별하는 걸 보면, 이런 상황이 처음은 아니라는 소리였다.


한 술 더 떠서 할머니까지 안간힘을 다해 내 팔을 붙들었다. 자칫 잘못하다가 할머니가 넘어질까 싶어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멍하니 서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이게 바로 이단 옆차기라는 거다!”


나는 보았다. 방기순이 저 멀리에서 붕 떠서 날아오는 것을.


- 퍽


방기순은 마치 로보트 태권브이처럼 그대로 놈의 등짝에 날라차기를 꽂아주었다.


“어윽!”


검은 모자를 쓴 남자가 칼을 바닥에 떨어뜨리면서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나는 할머니의 손을 꼭 쥐었다.


“할머니, 저놈 보이스피싱범이에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아들은 괜찮아요.”


그러나 지금 이 순간, 할머니에게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노오옴! 정녕 천벌이 두렵지 않은 것이냐! 성규 내놔, 내 아들 어서어!”


거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남자가 바닥에 나뒹굴자, 어디선가 각목과 깨진 술병을 든 남자 셋이 나타난 것이었다.


“젠장, 역시 그냥 운반책이 아니었어. 석정 씨, 뛰어!”


방기순은 두 손에 침을 퉤 뱉고는 그들 앞을 막으며 내게 소리쳤다.


“빨리 경찰서 찾아! 그리고 알지?”


우리는 만약의 경우 뿔뿔이 흩어지게 되면, 저녁에 다시 한 장소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곳은 물론 무의도의 방갈로였다.


“거기서 뵙죠!”


나는 할머니의 손을 꼭 잡고 고개를 끄덕이며 진심을 담은 눈빛을 보냈다. 할머니가 잠시 먹먹한 표정으로 주춤한 사이, 나는 큰길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살면서 이렇게 온 힘을 다해 달려본 적이 있던가? 학창 시절의 체력측정 시간이나, 유격훈련을 받았을 때도 이렇게 뛰지는 않았던 것 같다. 아, 중학교 때 집 앞 골목에서 깡패를 만났을 때랑 비슷하려나? 아니다. 단언컨대 지금이 더 빠르다고 자신할 수 있다.  


“으으을, 으으, 으을…”


나는 입을 반쯤 벌린 채 침을 질질 흘렸고, 턱이 덜덜 떨리면서 괴상한 신음까지 흘러나왔다.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그런 나를 누군가 쫓아오고 있다는 사실. 힐끗 보니 적어도 방기순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한 가지는 분명했다. 나는 여기서 잡히면 죽는다.


“으으아아아아!”


나는 정말 초인적인 힘으로 달리고 또 달렸다. 이번에야말로 그 어떤 이유로도 멈추지 않을 것이었다. 형들이 쫓아와서 나를 밟아도, 달리기에는 룰이 있다고 협박해도 결코 바닥에 웅크린 채 발길질을 받아주지 않을 것이었다. 나는 그래도 달릴 것이었다. 내 속도로. 나만의 보폭으로. 그러니까 걸음아, 제발 나를 살려다오.


그렇게 얼마쯤 달렸을까, 멀리서 얼핏 파란 간판이 보인 것도 같았다. 내가 땀인지, 땀이 나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흠뻑 젖은 채로 나는 럭비공을 품에 안고 마지막 스퍼트를 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곳에 이르렀을 때 나는 바닥에 쓰러지며 이렇게 외쳤다.


“터치다운!”


신문지 꾸러미 안에는 정확히 3백만 원이 들어있었다. 엄마가 보이스피싱 조직에 보낸 돈도 딱 3백이었다. 앞이 흐릿했지만 금액만큼은 정확히 확인할 수 있었다.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와중에 할머니는 연신 내 손을 붙잡고 당신의 볼에 부비셨다.


“고마워, 석정이라고? 그래, 내 아들 같은 우리 석정이.”


그 와중에도 나는 비닐봉지에 머리를 파묻고 토악질을 하고 있었다. 그다음부터는 몇 가지 기억들이 파편적으로 떠오를 뿐이었다. 검은 모자를 쓴 놈이 수갑을 차고 나를 노려보던 기억이 하나. 경찰서장이 내 이름과 연락처를 적어가더니 얼핏 ‘의로운 청년상’을 운운했던 기억이 둘.


“예? 의로운 청년상이라뇨?”


운반책 놈이 휘두른 칼을 떠올리며 잔뜩 겁을 먹고 나온 기억이 셋.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다시 온 길을 되돌아가려다가 길을 잃고 헤매던 기억이 넷. 끝내 방기순도 PC방도 찾지 못하고 택시를 잡아탄 기억이 다섯. 그리고 밤이 늦을 때까지, 아니, 자정이 넘을 때까지 무의도 방갈로에서 그들을 기다렸던 기억이 여섯. 아무도 나타나지 않자, 혼자 술을 마시며 히죽히죽 웃다가, 갑자기 가슴이 뻥 뚫린 것처럼 울었던 기억이 일곱. 그렇게 울다가 어느 시점에 불현듯 현서에게 문자를 보낸 기억이 여덟. 꿈속에서 방갈로가 사실 우주선이었고, 나 혼자 그것을 타고 우주로 날아갔던 기억이 아홉.


모든 것은 한여름 밤의 꿈이었을까. 아니면 그들은 각자 자신의 별로 돌아간 것일까. 그들은 끝내 방갈로로 돌아오지 않았다.


이튿날 맨 정신으로 깨어나 보니, 핸드폰에 문자 하나가 와있었다.      


- 그래, 석정아. 수요일에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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