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업계에서 일을 하면서 터득한 전문 용어 '치받'. '치고받는다'의 줄임말인 치받 일정이 주어지면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한계에 다다를 각오를 해야 한다. 많이들 알다시피 여행업은 성수기와 비수기가 명확하게 구분되는데 인솔자 역시 시즌제를 비껴갈 수 없다. 한창 성수기에 접어들면 패키지 상품에 배정되는 인솔자 인력이 모자라서 출장이 연이어 잡히기도 한다. 출장 뫼비우스의 띠에 갇히는 모양새다. 신입이었던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치받 일정이 잡힌 것이다.
이게 왜 힘드냐 하면 한국에 입국한 지 24시간이 채 되기 전에 다시 출국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동 출입국 심사가 아니었으면 오랫동안 쓰려고 10년짜리로 발급받은 여권은 이미 수명이 다했을 거다. 피곤함에 몸이 담가져 채 마르기도 전에 또 다른 피곤함을 흡수할 준비를 해야 한다. 여러 겹의 피로가 누적되어 몸안에서 나이테를 그리고 있을 것만 같은 시기다. 업무는 인천공항에서 시작되는 게 아니다. 이미 며칠 전부터 안내 전화 및 문자, 업체 미팅, 손님 전달물품 정리, 상품 및 손님 서류 정리 등 자질구레하게 할 일이 너무나도 많다. 현실적이게도 그중에서 가장 골치 아픈 문제는 짐 싸기이다. 미리 계획되었더라면 그나마 나았을 텐데, 해외에 나가 있는 동안 잡힌 치받에 몸은 열 개라도 모자라다. 코너 속 코너처럼 출장 중에 다른 출장을 준비해야 한다.
같은 비행이어도 출근 때와는 달리 퇴근길 비행은 유독 짧게 느껴진다. 한동안 못 누릴 휴식이기에 더더욱 그렇다. 착각이 만들어내는 찰나의 시간 동안 무사히 일을 마치고 인천공항에 도착하면 목적지는 집이 아니다. 여행사와 미팅을 하고 와야지 마음 편히 집으로 갈 수 있는데, 집에 오면 짐 챙기기는 일단 패스. 가장 시급한 빨래부터 해결한다. 출장 내내 고단함으로 때 묻은 옷가지들을 세탁기에 넣고 갖가지 여행지에서 스며든 낯선 내음들을 걸러낸다. 세탁기가 열심히 돌아가는 동안 나의 전화 돌리는 업무도 동시에 진행된다. 아까 배웅해드렸던 손님들의 이름은 기억 속에서 빠르게 삭제되고 새로운 명단으로 업데이트된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찰나의 휴식은 만들어줘야 한다. 짐도 정리할 겸 새로 사 온 기념품들을 꺼내본다. 그 무게 못지않게 내 몸도 무겁게 느껴진다. 하루도 거르지 못하고 손님을 또 맞이해야 하다니. 그런 생각과 함께 출장준비는 계속된다. 몇 시간이 지났을까. 안내 전화 업무가 끝나면 이제서야 본격적으로 짐을 챙기기 시작한다. 저번에는 텅 빈 케리어를 빠릿빠릿하게 채워 넣었던 것 같은데, 새로운 기념품으로 채워 넣을 공간을 확보해가며 둔하게 케리어를 비워낸다.
남미는 유럽 패키지와는 다르게 가져가야 할 짐이 더 많은 편이다. 상품에 포함되어 있는 n개국을 다 돌아야 하는데 크나 큰 남미 대륙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다 보니 계절이 각기 다를 수밖에 없다. 1년이라는 나이를 먹지 않고도 봄부터 겨울까지 사계절을 지내고 올 수 있는 매력이 있다. 빡센 상품의 경우에는 입·출국 도장 잉크가 마르기가 무섭게 하루 이틀 꼴로 비행기를 타고 다니며 이동하기 바쁘다. 손님들 말에 의하면 평생 탈 비행기는 다 탔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고 한다. 어쨌든 짐은 비행기가 실어다 주니 지구 반대편으로 가는 만큼 손님들은 챙겨가고 싶은 짐이 많다. 하지만 반팔부터 패딩까지 다 들어간 케리어는 이미 옷만 넣었는데도 토해내기 직전 상태다. 웃기게도 그런 틈 사이로 영양제와 홍삼, 간식들은 제 영역을 기어이 만들어낸다. 그렇기에 현지에서 그 몸값이 더 귀해지는 녀석들이다.
인솔자 모드로 전환되면 연속된 일정으로 너덜너덜해진 체력을 감추는 연극이 시작된다. 하지만 연기는 고작 생존형 아마추어 수준이어서 속지 않는 손님들도 계셨다. 그런 손님들은 나에게 감동을 주시곤 하셨다. 버스 이동 중에 앞으로 향하는 파도타기를 만들어 맨 앞자리에 앉아있는 나에게 간식을 한봉다리 싸서 건네주시는 일이 많았다. 가끔씩 버스 좌석에 간식이 놓여있을 때도 있었는데, 정체를 알려주지 않는 마니또가 생긴 기분이었다. 빡빡한 일정 중에 주어지는 소중한 자유시간에 카페에 나를 데려가서 맛있는 음료를 건네주시는 분도 계셨다. 그중에서도 날짜수에 맞추어 챙겨 오셨을 법한 영양제를 아쉬움 없이 나에게 주신 손님의 선물은 감동으로 나를 한껏 달아오르게 했다.
어찌 보면 치받의 잔혹함에 대해 연신 떠들어댄 듯 보여도 사실 행복했다는 말을 길게 풀어낸 것과 다름없다. 고단함이 두려움을 이겨 먹을 정도로 바쁘고 힘들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그리운 순간들이다. 나는 일에 완전히 빠져들어 있었고 무척 행복했다. 여행이 일이 될 수 있을까 싶었던 나였기에 매 순간이 경험이고 성장이었다. 미처 마치지 못한 학업으로 인해 아쉽게도 일을 손 놓게 되었는데, 코로나 바이러스가 확산되어 어차피 일을 못했을 상황이 되어버렸다. 관광산업이 침체되었고 동료분들이 출장을 나가지 못하고 계신다. 여행이 일이 되었던 시절이 한 여름밤의 꿈으로만 막을 내리지 않기를. 여행에 굶주린 많은 사람들이 전 세계를 누리며 배부르기를. 전 세계가 우리의 놀이터가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