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늘 소망했던 것이, 가족들이랑 밥 한 끼 같이 먹고 헤어질 정도의 가까운 거리에 사는 것. 부모님은 늘 경남 창원에 계셨고 나는 베이징과 서울을 전전하며, 집에 한 번 가려면 비행기를 타거나 고속버스를 타거나 혹은 KTX를 타고 택시를 갈아타는 번거로움을 감수해야 했다. 바쁠 때는 집에 한 번 다녀오는 것이 부담스럽다고 느껴졌던 게 사실이다.
경기도 끝자락에 위치한, 충북과의 경계선으로 이사를 온 지 3년이 넘었다. 사무실은 경기도에 두고, 집은 충북에 잡게 되었다. 실상 충청도 사람이 된 것이다. 집에 가기는 더욱 힘들어졌다. 창원은, 차로는 세 시간이면 닿을 거리지만, 나의 서툰 운전 실력으론 운전을 해서 집에 가는 것은 언감생심 꿈도 못 꾼다. 고속버스나 기차도 제대로 없는 시골에 살게 되니, 집에 가는 일은 서울에 살 때보다 더 번거로워졌다.
그런데 내가 기가 막힌 생각을 해냈다. 부모님 집에서는 두 시간, 우리 집에서는 한 시간 즈음 걸리는 중간 지점, 경북 문경에서 만나자고 한 것이다. 그 정도면 아빠와 내 운전 실력을 감안했을 때 꽤 공평한 거리라고 생각했다. 부모님은 원래도 차 타고 한두 시간 거리의 명소에 가서 트래킹 코스를 걷거나 꽃구경 하는 것을 즐겨하셨으니 그리 힘든 일은 아닐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이 붐비지 않을 평일 낮에, 문경에서 점심을 한 끼 함께 먹기로 했다.
아침에 사무실에 들러 강아지들을 돌보고, 급한 일을 해치워 놓고, 10시 무렵 시동을 걸며 문경 가는 내비게이션을 찍어 보았다. 고속도로도 아닌, 평소에 많이 가 본 익숙한 국도를 타고 가는 길이었다. 내심 안도를 하며 운전대를 잡았다. 거듭 얘기하지만 나의 운전실력은 썩 시원치가 않다. 고속도로에서 남들 쌩쌩 달릴 때 혼자서 가장 갓길을 선택해서 달리는데, 느리게 운전해 가는 차를 발견하면 그 뒤에 촐싹 붙어 겨우 따라가는 수준이다. 고속도로 운전은 그마저도 신호 한 번 걸리는 일 한 번 없이 옴짝달싹 못하며 정자세로 가야 하기 때문에 부담스럽다. 스무 살 때, 운전면허 시험도 포터트럭 끌고 무려 1종 보통을 한 방에 붙었는데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
도로를 달리는데 문경 가는 길, 날이 참 좋았다. 2월 말이라 잠바를 입었지만 따뜻한 햇볕과 이른 봄바람에 몇 번 창문을 내려 미세먼지도 없는 봄내음을 맡으며 길을 나섰다. 국도를 달리는 차는 적었고 덕분엔 나는 속력을 내 마음대로 줄였다 늘였다 하며 여유롭게 목적지를 향했다. 아직 부모님이 건강해서, 차를 타고 부모님을 만나러 갈 수 있다는 사실이 약간 감동적인 것 같다는, 말랑한 기분까지 들었다. 언젠가 먼 훗날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면, 아빠, 엄마를 만나러 가는 오늘의 기분이 기억날 수 있겠지.
먼저 도착한 부모님은 이미 문경새재 한 바퀴를 걷고 내려와 있었다. 한 달 여만에 보는 부모님이다. 남쪽에서 올라온 부모님은, 문경 바람이 세다며, 왜 이렇게 춥냐고 성화다. 이게 북녘 바람입니다, 부모님. 나도 매번 느낀다. 창원에 내려갈 때마다 얼마나 날씨가 포근했는지. 그럼에도 많이 걸어서 땀이 났다며 호들갑인 아빠 엄마를 내 차에 태우고 예약해 둔 점심식사를 하러 갔다.
문경 맛집과 카페를 얼마나 검색했는지 모른다. 우리에게 한 끼 식사는 일 년에 몇 번 없는 연례행사이므로. 코로나가 터진 첫 해는, 단 한 차례 부모님과 겨우 식사를 했다. 많아봤자 부모님과 일 년에 가질 수 있는 식사 자리는5~6번 안팍이다. 부모님이 30년 후에 돌아가신다고 가정하면, 부지런히 일 년에 5~6번을 봐야 부모님 얼굴을 볼 날이 150번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지금부터 한 번씩 볼 때마다 남은 횟수가 깎여 내려가는 것이다. 하지만 괜찮다. 20년 후, 30년 후에는 의학이 더욱 발달해서 120세에서 140세까지 살 지도 모른다고 하니. 인구 고령화가 심각한 문제라고는 하지만 내 부모님만은 오래 곁에 계셨으면 좋겠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다.
그래서 나는 귀한 기회를 맛있게 쓰고 싶어서, 주저 없이 가장 깔끔하게 보이는 집을 찾아 맛있는 한정식을 예약했다. 불고기 전골과 돌솥밥이 푸짐하게 나오는 한 상이었다. 세 식구가 다 먹기 어려울 정도로 반찬도 넉넉하게 나왔다. 아빠가 마음 놓고 맛있게 먹는 것을 보니 내 마음이 놓였다. 어릴 적 아빠는 우리가 다 먹을 때까지 깨작깨작 드시다가, 우리가 숟가락을 놓으면 그제야 남은 걸 마음 놓고 드셨다. 어릴 적엔 몰랐지만 이제는 아빠의 식사 속도를 살필 수 있을 만큼 나도 많이 컸다.
식사 후, 점찍어 둔 찹쌀떡 맛집으로 이동했다. 밥집에서 30분 거리의 곳이었다. 문경 시내를 구경도 할 겸 드라이브를 하는 느낌으로 가자고 했다. 맛집으로 유명한 곳이라 아침 일찍 전화를 걸어 찹쌀떡 두 박스를 예약을 해 두었던 참이었다. 아주 시골의 매우 오래된 빵집이었는데, 찹쌀떡과 찹쌀도넛만 판매하는 곳이라고 했다. 방송에 나온 후 맛집으로 입소문을 타며, 여행객들이 꼭 들러 가는 곳이라고 했다. 지방마다 이런 오래된 전통 맛집이 하나씩 있기 마련이다. 이런 곳은 맛도 맛이지만, 들러서 사 먹는 재미가 있지 않은가. 찹쌀도넛은 예약 없이 선착순 판매라고 했는데 오후 1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는데 이미 완판 되고 없었다. 우리는 예약된 찹쌀떡 두 박스만 사서 돌아왔다. 10개 들이 한 박스가 단돈 6,000원. 가격도 너무 저렴하다!
찹쌀떡 가게에서 6분 거리의 카페로 향했다. 가는 길이 험난했다. 시골의 좁은 밭두렁을 지나가야 나오는 곳이었다. 마주 오는 차가 있으면 서로 비켜서야 할 만큼 좁은 길이었다. 엄마는 이런 길을 어째 다니냐고 했지만 나는 시골 살면 원래 다 이런 거라며 거침없이 액셀을 밟았다. 시골은 그런 곳이다. 웬만해선 마주 오는 차가 없고, 마주 오는 차들은 길을 들어서기 전에 가시거리에 맞은편 차가 보이면 서서 기다려주기 마련이다. 나는 시골이 좋다. 시골사람들의 이런 여유가 너무 좋다.
우리가 도착한 카페는 한 마을의 한옥을 개조해서 만든 고즈넉한 집이었다. 300평 정도 되어 보이는 카페에 한옥집이 ㄱㄴ 모양으로 들어서 있었다. 마당에도 테이블이 있었지만, 방문을 하나씩 열어보니 안에 들어가서 조용히 차를 마실 수 있는 공간이 나왔다. 테이블도 옛날에 쓰던 낡은 전통 밥상 그대로였고, 창호지 문에, 마룻바닥도 옛날 할머니집에서 보던 느낌대로였다. 문경사과주스, 오미자차, 그리고 커피를 받아 들고 방 안에 앉았는데, 너무나 익숙하다. 어릴 적 할머니집을 개조하기 전에, 우리는 방 안에 들어앉아서 할머니가 만들어준 식혜를 이렇게 밥상에 놓고 먹었다. 우리는 할머니집 가서 음료수 먹는 기분을 내려고 이 먼 길을 왔다며 웃었다.
마을은 조용했다. 우리도 소리를 낮추어 대화를 했다. 더러 손님들이 오갔지만 고요한 날씨와 마을의 분위기가 도시에서는 느낄 수 없는 카페의 느낌이긴 했다. 다시 시동을 걸어 아빠가 차를 세워 둔 처음의 목적지로 향했다. 시골길은 운전하기 너무나 편리하다. 우리는 시골길은 사람이나 차 보다 동물이 더 무섭다며, 도로에서 고라니를 만난 이야기를 나누며 목적지에 도착했다. 아빠는 운전하며 사고가 날 수 있는 모든 상황들을 운전하고 있는 나에게 굳이 설명을 하며 더욱 내 손에 땀을 쥐게 만들었다. 아빠는 하루종일 내가 가이드를 하니 편했다고 했다. 아빠가 했던 모든 것들 - 여행 일정을 짜고, 운전을 하고, 음식값을 지불하는-을 모조리 내가 대신 했다. 나도 보람있었다.
아빠는 또 두 시간을 넘게 달려 집에 가야 한다. 서로 운전을 조심하라며 아쉬운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각자의 차를 타고, 각자의 집으로 향했다. 부모님과 헤어지는 순간에는 아직도 괜히 눈가가 뜨거워진다.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간 엄마가 저녁밥을 짓기 싫을 것 같아, 배달 앱으로 치킨을 한 마리 시켜 드렸다. 엄마가 매우 만족한 모양이었다. 다음에 또 다른 곳에서 만나자고 했다.
나이가 들고 부모님과 크게 마찰이 생긴 적이 한 번도 없었던 듯하다. 부모님도 나도 서로 고집 피우지 않고한 발씩 양보한 것이 큰 이유겠지만, 서로 자주 보지 않으니 더욱 애틋하고 조심하게 되는 것 같다. 가끔 이렇게 만나보면, 1년 365일 한 집에서 살 부대끼고 살던 시절이 아득하다. 서로의 바뀐 모습이나 새로운 습관에 흠칫 놀라기도 한다. 가족을 만나는 일이 이렇게 동창회를 하거나, 전우회를 하는 것 같은 느낌일 줄이야. 어릴 적엔 몰랐겠지. 내가 이렇게 커서 운전을 다 하고 부모님을 모시고 여행을 하게 될 줄을. 아빠도 엄마도 상상도 못 했겠지. 꼬꼬마였던 나를 업어 키울 시절에는...
그래서 우리는 다음에도 또 만나기로 했다. 다음에는 아빠가 좋아하는 야구 개막전을 할 적에 한화 홈구장에서 보기로. 아빠는 수년간 한화 팬이었으면서 한 번도 홈구장에서 직관을 한 적이 없다. 치킨과 맥주를 가득 시켜서 야구 관람석에 앉아서 뜨겁게 응원을 하면 얼마나 즐겁겠는가. 기분 좋은 관람을 위해 한화가 꼭 이기길 바란다.
글을 마무리하며, 한화 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