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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퐝지 Jul 28. 2019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시간은 불연속 하며, 사건의 집합이다.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라는 책 제목을 인터넷 서점에서 몇 번 접했지만, '유튜브 영상 제목 같은 지나친 과장이  아닐까'라는 의심이 들었다. 애써 관심을 거두었지만 결국 제목에 끌려 읽게 되었다.


시간은 존재하고, 당연히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흐른다고 생각했었다.

이 책을 읽고 나니,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린 기분이다.


시간은 흐르지 않고, 세상은 사물들의 조합이 아니다.



시간은 불연속 하다

시계로 측정한 시간은 '양자화'된다. 다시 말해 특정한 값만 취하고 다른 값들은 없는 것이다. 시간을 연속적인 것이 아니라 여러 알갱이로 나뉜 것이라 생각하면 된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느끼는 시간이 흐른다는 속성이 사라지는 최소 시간을 '플랑크 시간'이라 부른다. 10의 -44승 초, 즉 10억 분의 10억 분의 10억 분의 1억 분의 1초이다. 이 엄청나게 짧은 시간 속에서 시간의 양자 효과가 나타난다.

시간의 '양자화'는 시간 t의 거의 모든 값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암시한다.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정확한 시계로 시간 간격을 측정한다면, 측정된 시간은 오직 몇몇의 분리된 특정한 값만을 취할 수 있다는 얘기다. 간격은 연속적이라 생각할 수 없다. 균일하게 흐르는 것이 아니라 캥거루처럼 한 값에서 다른 값으로 껑충 뛰어넘는, 불연속적인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다시 말해, 시간의 '최소' 간격이 존재하는데 이 간격 이하로 내려가면, 가장 기본적인 의미에서 보더라도 시간으로서의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양자역학처럼 분자들의 움직임이 어떤 방정식에 의해 예측 가능하지 않은 '양자 영역'에 진입하면 양자의 위치를 예측할 수 없고 확률 구름으로만 추정할 수 있는 것과 같은 개념인 것 같다. 시간 또한 양자화될 수 있다니, 낯설고도 기묘했다.


미시 세계에서, 시간은 의미가 없다.

사물의 미시적인 상태를 관찰하면, 과거와 미래의 차이가 사라진다. 사물의 기본 문법에서는 '원인'과 '결과'의 구분이 없다.
예를 들어 이 세상의 미래는 현재의 상태에 따라, 즉 과거의 상태에서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현재에 의해 결정된다. 우리는 원인이 결과보다 앞선다는 말을 자주 하지만, 사물의 기본 문법에서는 '원인'과 '결과'의 구분이 없다. 대신 서로 다른 시간에서의 사건들을 연결하는, 물리 법칙들에 의해 표현되는 규칙성이 있는데, 여기서 미래와 과거는 서로 대칭적이다.

미시적인 관점에서 보면 과거와 미래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결국 과거와 미래의 차이는 세상을 보는 우리 자신의 희미한 시각 때문에 발생한다.

저자는 우주가 어떤 특별한 구성으로 '지금' 존재하며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한다는 생각은 타당하지 않다고 말한다. 또한, 과거와 미래의 차이는 기본적인 운동 법칙이나 자연의 문법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무질서해져서 특수하거나 특별한 상황이 사라지는 것이라고 한다. 마치 분자들이 열에 의해 뜨거운 쪽에서 차가운 쪽으로 이동할 뿐 그 반대로 이동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세상은 사물이 아닌 '사건'의 총체이다.

세상은 '사물'로 이루어진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물질로, 실체로, 현재에 있는 무엇인가로 이루어졌다고 말이다. 혹은 사건으로 이루어진 세상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우연적 발생으로, 과정으로, 발생하는 그 무엇인가로 이루어진 세상으로 보는 것이다. 그 무엇은 지속되지 않고 계속 변화하며 영속적이지 않다. 기초 물리학에서 시간 개념의 파괴는 두 가지 관점 중 첫 번째 관점이 붕괴된 것이지 두 번째는 아니다. 변하지 않는 시간 속에서의 안정성이 실현된 것이 아니라, 일시성이 언제 어디서나 존재하게 된 것이다.

세상을 사건과 과정의 총체라고 생각하는 것이 세상을 가장 잘 포착하고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다. 상대성이론과 양립할 수 있는 방법은 이것뿐이다. 세상은 사물들이 아닌 사건들의 총체이다.

사물과 사건의 차이는 '사물'은 시간 속에서 계속 존재하고, '사건'은 한정된 지속 기간을 갖는 것이다. 사물의 전형은 돌이다. 내일 돌이 어디 있을 것인지 궁금해할 수 있다. 반면 입맞춤은 '사건'이다. 내일 입맞춤이라는 사건이 어디에서 일어날지 묻는 것은 의미가 없다. 세상은 돌이 아닌 이런 입맞춤들의 네트워크로 이루어진다.

'사물' 자체도 잠깐 동안 변함이 없는 사건일 뿐이다. 이후에는 먼지로 돌아간다. 사실 모든 것은 언젠가 먼지가 된다. 이처럼 시간의 부재가 모두 얼어붙어 꼼짝도 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세상을 괴롭히는 끊임없는 사건들이 시간의 흐름으로 정리되지 않으며, 거대한 똑딱이로 측정되지도 않는다는 뜻이다. '시간'이 그저 사건을 뜻하는 것뿐이라면, 모든 사물은 시간이다. 시간 속에 있는 것만 존재한다.

사물도 결국 잠깐 동안 변함이 없는 사건일 뿐이고, 이후에는 먼지로 돌아간다. 우리는 '실체'의 관점에서 세상을 파악하려고 했지만 오히려 세상은 사건들 사이의 관계로 이해될 수 있다.


우리가 시간을 만들어냈다.

우리는 이야기다. 우리의 눈 뒤쪽에 있는 복잡하기 짝이 없는 20센티미터 영역 속에 담긴 이야기들이다. 또한 우리는 선이다. 이 혼란스럽고 거대한 우주의 조금 특별한 모퉁이에서 세상의 일들이 뒤섞이면서 남긴 흔적들,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예견하고 엔트로피를 성장시키도록 맞춰진 그 흔적들이 만들어낸 선들이다.

이 공간, 즉 앞날을 예측하려는 우리의 연속적인 과정과 결합된 기억이 시간을 시간으로, 우리를 우리로 느끼게 하는 원천이다. 우리가 내적 성찰을 통해 공간이나 물질이 없는 곳에서 존재하는 일은 상상할 수 있지만, 시간의 흐름 속에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상상을 할 수 있을까?

이것은 우리가 속한 물리계가 나머지 세상과 특별한 방식으로 상호 작용을 하고 흔적을 남기며, 물리적 실체인 우리가 기억과 예측을 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 예측은 사소하지만 귀중한 시간에 대한 관점을 갖게 해준다. 시간은 우리를 세상의 일부와 접하게 해준다. 그러니까 시간은, 본질적으로 기억과 예측으로 만들어진 뇌를 가진 인간이 세상과 상호 작용을 하는 형식이며, 우리 정체성의 원천이다.

그리고 우리의 고통의 원천이기도 하다.

우리는 어떤 것을 갖게 되고 그것에 집착했다가 결국은 끝나기 때문에 고통이다.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과거에 혹은 미래에 있지 않다. 지금 여기에, 우리의 기억 속에, 우리의 예측 속에 있다. 우리는 영원불멸을 갈망하고 시간의 흐름에 고통스러워한다. 시간은 고통이다.

이것이 시간이다. 이런 특성이 우리를 매혹시키며 안절부절못하게 만들고, 어쩌면 이런 고통스러운 측면 때문에 여러분도 지금 이 책을 손에 들고 있을지 모른다. 왜냐면 시간은 세상의 일시적인 구조이고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의 일시적인 변동일 뿐이면서도, 우리를 어떤 존재로 생기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시간으로 만들어진 존재다. 그 때문에 우리가 존재하고, 우리 자신에게 우리라는 소중한 존재를 선물하고, 모든 고통의 근원인 영원에 대한 허무한 환상을 만들게 한다.

우리가 공간과 사물을 바라보는 방식이 시간을 만들어냈다. 무언가를 얻고 잃는 고통의 과정을 겪으며 우리는 기억하고 상상한다. 이렇게 세상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우리에게 시간을 만들어내도록 했다.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노래는 시간에 대한 인지이다. 우리가 양자화된 순간 속에서 들었던 '음'을 기억하고, 그다음 어떤 순간의 양자화된 순간 속에서 발현된 다음 '음'을 기억할 때 음악은 우리에게 흐르는 시간이 된다. 우리가 기억하기에 음은 시간을 타고 음악이 된다.



그래서, 시간은 무엇일까?

시간은 유일하지 않다. 궤적마다 다른 시간의 기간이 있고, 장소와 속도에 따라 각각 다른 리듬으로 흐른다. 방향도 정해져 있지 않다. 과거와 미래의 차이는 세상의 기본 방정식에서는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우리가 세부적인 것들을 간과하고 사물을 바라볼 때 나타나는 우발적인 양상일 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주의 과거는 신기하게도 '특별한' 상태에 있었다. '현재'라는 개념은 효력이 없다. 광활한 우주에 우리가 합리적으로 '현재'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시간의 간격(기간)을 결정하는 토대는 세상을 이루는 다른 실체들과 다른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다. 그것은 역동적인 장의 한 양상이다. 이 역동적인 장은 도약하고 요동치며 상호 작용할 때만 구체화되며, 최소 크기 아래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세상의 시간을 잘게 쪼개고 쪼개서 나온 최소 시간에서는 과거와 미래의 차이가 없다. 그 간격은 연속되지도 않는다. 시간은 무질서한 사건들의 발생이다.

미시적인 관점에서는 모든 것이 특별하기 때문에 시간은 의미가 없다. 다만 미시적인 사건들이 모여 여러 가지 경우의 수가 합쳐지는 경우 엔트로피는 증가한다. 시간은 사건들의 총체이기에 시간은 변화한다.




모든 사물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현재는 없다. 사물은 각각의 광원뿔을 가진다. 현재는 과거와 미래를 잇는 점이다. 그렇다면 나의 현재를 공유하는 다른 사물들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진다. 널찍한 과거와 미래 그리고 그 찰나를 잇는 나의 지금이 당신의 지금과 교차하여 맞아떨어진다.

우주에 널려진 수많은 시간의 원뿔들 중에서 당신과 나의 지금이 만나 교차하는 이 순간이 얼마나 우연적이고 운명적이란 말인가.

당신은 미래에, 나는 과거에 있어 이 공간에서 만나지 못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신과 나는 지금 서로 다른 현재에서 미묘한 시간의 틈을 교차하여 마주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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