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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퐝지 May 12. 2019

조금은 따뜻해져도 괜찮아

문유석 판사의 <판사 유감>

<개인주의자 선언>으로 유명한 문유석 판사가 겪었던 판결과 그가 고뇌했던 내용에 대해 적어 내려 간 글이 모여있다. 

읽다 보면, 판사는 어떤 고민을 하고 얼마나 다양한 인간사를 만나는지 간접 경험할 수 있었다. 겉보기엔 딱딱한 판사라는 사람이 저자로 인해 더 가깝고 인간적으로 느껴졌다. 읽는 동안 눈시울이 붉어졌다가 마르기를 반복했다.


몇 가지 생각해볼 만한 내용을 정리했다.


몇 개의 숫자와 텍스트로 인해, 냉혹해진 건 아닐까?

우리는 어떤 사건에 대한 판결을 보고 법관에 대한 신뢰감을 저버릴 때가 많다. 여기에는 두 가지 잘못이 있다.

1. 자극적인 헤드라인과 단편적인 팩트를 강조하는 언론사

2. (1로 인해 어쩔 수 없지만) 겉으로 보이는 사실로 지나치게 냉혹한 판단을 해버리는 대중


막상 국민참여재판을 해보면, 배심원들이 오히려 더욱 온정적인 처벌을 원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사건의 복잡한 이면을 알게 되면, 판결을 내린다는 것이 어렵고 단편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가 모든 사건에 대한 진실을 다 파악해야만 그것에 대한 의견을 낼 자격이 생긴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런 일을 법관들이 하고 있기 때문이다. <판사 유감>을 읽고, 법관들을 신뢰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얼마나 숫자와 텍스트로 인해 냉혹해졌는지 돌아보게 되었다.

우리는 신용불량자 400만이 어떻고 하며 쉽게 숫자로 이야기하지만 그 한 명 한 명은 숫자가 아닌 피가 흐르는 ‘사람’이고, 가정이 있고, 부모형제가 있고 아이도 있습니다. 400만 명이 신용불량자라면 최소한 400만 가정이 빚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이며, 그중 상당수의 가정은 빚을 감당하지 못하고 파괴되어 아이들이 가정의 보호를 받지 못한 채 거친 세상에 던져지고 있는 것입니다.

기사를 보아도, 그것이 실제 우리 사회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지 공감하지 못했다.

2019년도 5월의 기사이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눈으로 읽고 가슴에 남기지 못했다.

위의 인용 구절처럼, 10퍼센트 증가한 2만 3천 여개의 가정이 파괴되었고 힘든 시간을 견디고 있음은 생각지도 못했다. 

이러한 사람들의 적합성을 판단하는 일을 하는 작가의 동료 판사의 말도 기억에 남았다.

개인파산 사건만 산더미 같이 처리하고 있는 그 친구에게 제가 하루는 지겹지 않느냐, 많이 힘들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평소에 말도 없고 표정 변화도 없던 과묵한 그 친구, 즐겁게 일하고 있다더군요. 힘든 사람들을 한 사람 한 사람 구하는 일인데 왜 즐겁지 않겠냐고요.

어떠한 서비스에 종사하고 있는 우리에게도 숫자와 텍스트를 실제 어떠한 대상으로 치환하는 일이 필요하고, 그래야 더욱 사명감을 가질 수 있다.


"지금 개발하고 있는 프로그램은 몇 십만 건을 처리하고 있고, 그것은 몇 만 명의 유저와 연관이 있어."

사람들에게 이로운 서비스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으로 개발자가 되었지만, 매일매일의 업무를 하다 보면 내가 하는 일의 숫자와 텍스트에 둔감해진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더 피가 흐르는 마음으로 일을 하고 싶다. 내가 처리하는 일이 숫자와 텍스트만큼의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는 일이라고.


행복이 뭡니까.

저자는 연수 시절 하버드에서 만났던 부탄 공주의 이야길 통해 행복에 대한 관점을 소개했다.

석사과정 LLM 학우 중에는 부탄 왕국의 공주님이 있더군요. 이야기를 나누어 보니 공주의 나라는 참 재미있는 나라였습니다. 1인당 국민소득은 2천 불에도 미치지 못하는데 교육과 의료를 국가가 보장하고 있고, 국민총행복Gross National Happiness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나라 중의 하나랍니다. 옥스퍼드에서 공부한 계몽 군주인 그녀의 부왕은 국정 기본 철학을 국민소득이 아닌 국민총행복 극대화로 여기고 있고, 국가 경영 전략은 의도적인 저속 성장과 개발 지연이라는 겁니다. 이 나라는 소박하나마 전통적인 가치와 문화 속에 상당히 안정되어 있고 경쟁이 치열하지 않답니다. 그래서 부왕은 행복도가 높은 국민들을 중국식 고도 성장으로 인한 아노미와 빈부 격차로 인한 갈등에 몰아넣고 싶지 않아 한답니다. 또한 태초 그대로 보존된 국토 대부분의 아름다운 자연을 관광 산업과 건설 산업의 탐욕 아래 파괴하고 싶지도 않다는 거죠. 성장은 추구하지만 다 같이 서서히 성장하길 원한다고요. 놀러 갈 테니 왕궁에서 재워 주겠냐고 농담 삼아 물어보니 선뜻 오케이하면서도 덧붙이기를, 자기네 왕궁은 검소한 목조주택에 불과하다나. 공주님의 시각이 아닌 그 나라 국민들이 보는 실상은 어떤지, 앞으로도 그 나라가 같은 전략으로 계속 행복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분명히 배울 점이 있다고 느꼈습니다.


부를 쌓는 것이 성장이고, 넘치는 물질만이 행복이 아닌 것 같다.

요즘에는 많은 사람들의 생각이 달라지고 있다. 적어도 주변의 친구들은 기존과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 집을 사야만, 재산이 넉넉해야만 행복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물론 이것은 현실적인 포기로 인한 사고의 전환을 포함한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일은 열심히 - 노는 것도 열심히 - 하는 것이 행복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작가가 언급했던 것처럼 최소한의 물질은 있어야 한다. 

배가 고픈데 행복할 수는 없다. 다만 배가 터질 듯 부르다고 행복한 것도 아니다.


선하면 행복합니까?
기성세대의 위선을 비웃고 가치를 전복하려 싸우다 보니 어느새 이제는 위악이 쿨한 것이고 날것의 욕망이 솔직한 시대가 돼 버린 것 같습니다. 하지만 위악이 위선보다 나은 것이 도대체 뭐죠? 물질적인 부가 인간의 가치까지 결정해 버리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은 부의 피라미드의 위로 올라가기만을 희망합니다. 아파트 평수 늘리기, 서울의 주변부에서 중심부로 한 걸음씩 이사 가기, 자동차 배기량 늘리기가 한 인간의 자아 성장인 시대. 그나마 다들 조금씩이라도 사다리 위로 올라갈 수 있는 고속 성장기에는 마약처럼 그 가속도에 취해 버티지만, 그 속도가 더뎌진 후에는 자신의 인생 자체가 실패인 것 같은 좌절감과 분노만이 남게 됩니다.

위악이 위선보다 나은 것이 도대체 뭐죠?라는 말이 명치를 때렸다. 선을 추구함으로써 살았던 세대들은 - IMF 금 모으기 운동에 집안 대대로 보관하던 귀중한 금을 갖다 바쳤던 세대는 나라는 구했지만 그들 자신은 구하지 못했다. 야근과 맞벌이, 구조조정과 퇴직 후 자영업의 치열함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결국엔 착하게 살아봤자 소용없다는 것을 알았고 지난 세월의 위선에 대한 반작용으로 위악을 당연시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런 척, 물질 만능인 척하고 싶지만 우리 몸속에는 뜨거운 피가 흐른다. 아닌 척해도 우리는 선을 지워버릴 수 없다. 그렇다면 이제 부끄러워하지 말고 위악만큼이나 위선도 한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작가가 에필로그에 언급한 것처럼 말이다.

사실 저는 다른 월급쟁이들처럼 적당히 나쁜 짓 할 때도 있고, 게으름도 피우고, 불평도 하며 살고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지독한 이기주의자에 개인주의자라서 멸사봉공할 뜻도 없고 제 자유와 행복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사람입니다. 틈만 나면 나는 놀기 위해 태어났다고 외치며 아름다운 지구별 구석구석 여행할 계획을 세웁니다. 단지 시험 하나 잘 봤다는 이유로 안정된 삶, 막중한 책임, 보람 있는 일을 할 기회를 부여받았으면서도 늘 만족하지 못하고 다른 길은 없을까 기웃거리기도 합니다.

세상에 신경 끄고 쿨한 개인주의자로 내 인생이나 행복하게 살든지,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낫게 바꾸기 위해 성실하게 헌신하며 살든지, 뭐 둘 중 하나로 정리되는 성격이면 편하겠는데 이건 본질은 전자인 주제에 후자를 감기처럼 가끔 주기적으로만 앓고 사니 남는 건 자기모멸일 때가 많습니다.

우리 대부분은 이 치열하고 경쟁적인 사회에서, 물질 만능주의 풍토가 만연한 이 세상에서 쿨한 척하고 싶지만 몸속 흐르는 따뜻한 피를 무시할 수 없다. 안타까운 사연에 눈시울이 붉어지고, 청와대 국민청원에 지지서명을 하러 기꺼이 시간과 마음을 할애한다.


앞으로 쿨한 척하지 않아야겠다. 오그라들고 찌질 해 보여도 말이다.

"사실 돈을 벌 수 있으니까 회사 다니는 건 맞는데, 내가 하는 일이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면 출근길이 즐거워. 그리고 그렇게 번 돈으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도 있고, 나중에는 다른 사람들을 돕는 일을 하고 싶어"라고. 




개인주의자 선언을 한 저자이지만 글에서는 온기가 느껴졌다. 

우리가 뜨거울 필요는 없는데, 차가울 필요도 없잖아. 

조금은 따뜻해져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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