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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퐝지 Sep 01. 2019

배드 블러드

테라노스 사태를 통해 배울 창업자의 자세

테라노스의 진실을 퇴사자들의 인터뷰를 통해 낱낱이 재구성한 <배드 블러드>를 읽었다. 약 450 페이지에 달하는 두꺼운 책이지만, 미친듯한 흡입력을 가진 책이라 흥미를 잃지 않고 읽을 수 있었다. 

몇 년 전 실리콘 밸리의 스타트업들이 각광받을 때, 테라노스에 대해 기사로 접했었다. 


피 한 방울로 건강을 진단할 수 있는 기술을 만든다.


페이스북이나 우버도 훌륭한 철학과 기술력을 지니고 있지만, 테라노스는 차원이 달라 보였다. 인터넷을 중심으로 사람들을 연결하는 플랫폼이 아니라 세상을 혁신하는 기술력. 실리콘 밸리에서 태어난 수많은 기업들과 다른 차원으로 혁신적이었다.


몇 년이 지나고, 모든 것이 거짓말이라는 기사를 보았을 때는 허무했다. 

그런 기술이 없다고..?

<배드 블러드>를 읽고 나면 왜 테라노스가 실패했는지에 대해 냉정하게 바라볼 수 있다. 




엘리자베스는 무능하지 않다.

엘리자베스는 테라노스의 창업자이다. 스탠퍼드 대를 중퇴한 바리톤 목소리를 지닌 여성 창업가이다. 책을 읽다 보면 사람들은 엘리자베스의 독특함에 매료된다. 그녀의 열정과 차분한 목소리, 사람을 꿰뚫어 보는 것 같은 깊은 눈빛. 

엘리자베스가 회사의 운영에 대해 몇 가지 잘못된 접근을 한 부분은 있지만, 그녀 자체는 무능하지 않다. 그녀는 똑똑하고 여느 창업가처럼 열심히 일한다. 타인에게 테라노스의 비전과 철학을 공감시키는 탁월한 설득력도 지니고 있다. 

엘리자베스는 이사회로부터 퇴출당할 뻔한 위기를 겪는데, 퇴출이 확정된 상태에서 이사진들을 상대로 몇 시간 동안 설득을 통해 자리를 되찾은 일화가 있다. 이미 내치기로 마음을 정한 상대, 그것도 다수를 대상으로 설득을 통해 마음을 돌리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엘리자베스의 잘못 (1): 

비전을 믿다 못해 현실을 직시하지 못했다.

엘리자베스는 지나치게 자신의 비전에 대해 집착했다. 반드시 피 한 방울로 진단 결과를 얻을 수 있어야 하며, 진단 기계는 작고 아름다워야 한다. 

책을 읽다 보면 전문가들은 하나같이 피 한 방울로 테라노스에서 주장하는 몇 가지 검사 결과를 채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이 점이 확 와 닿았던 점이 <배드 블러드>를 읽을 때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팔의 혈관에 피를 채취할 수 있도록 어댑터를 꽂아 놓고 무려 3통이나 피를 뽑았다. 검사 결과는 몇 주 뒤에 나온다고 한다. 가뜩이나 공복인 상태에서 채혈을 하니 어지럼증을 느꼈다.

테라노스에 투자한 사람들 특히 주변에 아픈 이가 있는 사람들의 심정이 이해가 갔다. 건강한 사람도 이렇게 피를 많이 뽑는데, 아픈 이들은 얼마나 자주 혈관에 구멍을 내며 채혈을 할까. 그런데, 단 한 방울로 채취할 수 있다고?

전문가들의 말에 따르면, 여러 검사를 하기 위해서 필요한 최소 혈액의 양이 적지 않은데(각 항목마다 화학반응이 발생하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는 각각 필요한 혈액의 양이 있을 테니) 단 한 방울의 혈액으로 검사를 하려면 많이 희석해야 하고 그러면 부정확한 결과를 얻을 확률이 높아진다고 했다.

엘리자베스가 조금 양보하여 단 한 방울이 아니라 적당한 혈액의 양으로라도 검사하게 했다면.. 지나치게 진단기계의 디자인과 크기에 집착하여 진단 공정 시 필요한 기구와 부품을 넣을 수 있도록 양보했다면.. 원하던 혁신은 아니어도 환자들의 편의성을 위한 제품은 나오지 않았을까.



엘리자베스의 잘못 (2):

지나친 사내 정보 격리 문화

테라노스의 조직 문화 중 퇴사자들이 많은 불만을 표했던 것은 '격리'였다. 실리콘 밸리의 문화는 좋은 제품을 만들기 위해 각 전문가들이 역할을 가지고 소통하며 프로덕트를 만들어내는 '역할 조직'이 주이다. 다수의 전문가들이 협업하고 해결방법을 찾아야만 좋은 제품이 나올 수 있다. 그러나 테라노스는 각 전문가들의 정보를 완벽하게 통제했다. 엘리자베스는 제품에 대한 정보를 통제하고, 전문가들 간의 소통을 차단했으며 그들에게 한정된 정보만을 주었다.

치열한 시장에서 사외뿐 아니라 사내에서도 정보 보안을 철저히 하면 기술을 지킬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좋은 제품을 만들 수 없다. 직원들이 시너지를 낼 수 있는 토양을 만들어, 좋은 제품을 만들도록 하고 빠르게 출시하는 것이 시장에서 선구자가 됨과 동시에 보안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테라노스가 받은 투자액과 수많은 훌륭한 엔지니어들의 수준을 봤을 때, 테라노스의 비전은 이루어졌어야 한다. 그들이 서로 머리를 맞대고 고민할 수 있는 기회를 줬다면, 이토록 테라노스가 무너지진 않았을 것이다.


엘리자베스의 잘못 (3):

당신의 연인은 능력자가 아니다.

엘리자베스에게는 연인인 서니가 있다. 초창기에는 그에게 조언을 구하는 정도였지만, 테라노스가 커지자 그도 테라노스에 합류한다. 그러나 서니는 엘리자베스만큼 창업가적인 역량이 있는 것도 아니며, 무능 수준이 아닌 직원들의 사기를 떨어트릴 만큼 멍청했다. 

자신의 심기를 거스르는 직원을 당장에 잘라버리고, 테라노스가 사용하는 화학적 또는 기술적 지식에 대해 무지했다. 직원들은 그가 용어를 모르는 것에 대해 놀리기 위해 회의 도중 특정 단어를 반대 의미로 사용하고 그가 따라 하는지 보았고, 그는 바보같이 걸려들었다. (이는 서니가 수많은 능력 있는 직원을 자르고 직원들의 신뢰를 잃었기 때문에 당했던 일이다)

엘리자베스는 연인에 대한 사랑에 눈이 멀어 그의 능력에 대해 착각했다. 서니를 연인으로 신뢰하는 것과 그의 창업자적인 역량을 혼돈했다. 창업가는 원래 지인이었던 창업 멤버에 대해 더욱 날카로운 눈으로 그의 능력을 주시해야 한다. <권도균의 스타트업 경영 수업>에서도 말하듯 당신의 친구는 생각보다 유능하지 않을 수 있다.


투자자들은 테라노스의 비전을 산 것이다.

실리콘 밸리의 뜨거웠던 분위기.

페이스북과 우버, 그런 인터넷 플랫폼을 뛰어넘는 테라노스의 비전.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던 기억. 그들의 팔에 채혈을 위해 냈던 수많은 상처들. 

투자자들은 테라노스의 비전에 공감했고, 강력히 소망하다 보니 그걸 믿었다.

스탠퍼드 대를 중퇴한 창업가. 스티브 잡스를 닮은 모습. 바리톤의 목소리와 사람을 꿰뚫어 보는 눈빛.

믿고 싶은 것을 믿었고, 보고 싶은 것만 봤으니 유명한 투자자들 또한 판단력을 잃었다.



<배드 블러드>를 통해 내막을 자세히 알게 되니 더욱 안타까웠다.

엘리자베스가 조직 문화를 폐쇄적으로 통제하지 않았다면? 

철학을 조금 포기하고 채혈량을 늘렸다면? 

연인의 무능함을 깨닫곤 경영에서 배제시켰다면? 


수많은 투자금과 유능한 인재들과 자신의 창업가로서의 장점을 살렸다면, 테라노스의 제품이 세상에 나오지 않았을까?


테라노스 사태는 아쉬우면서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좋은 사례이다.

이전 09화 인간은 <오래된 연장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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