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 기억 안 나요?"

<건축학 개론>의 순대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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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끈한 국물이 생각난다. 고개를 깃에 묻고 걷다가 멈추는 허름한 순대국집, 내키면 소주 한잔 기울일 겨울 저녁. 뽀얀 국물에 수북한 순대를 꾸역꾸역 넘길 때쯤 또 하루가 간다. 특별한 일 없이 그렇게 그렇게 흘러가는 일상을 보낸 지 얼마나 되었던가. 아련하다. 애틋했던 것은 희미해졌고, 목숨을 걸었던 명분과 대상도 이제 기억과 흔적일 뿐. 전국 남자들을 오랜만에 그때 그 시절로 소환했던 2012년 영화 <건축학개론>을 다시 보았다.



주인공 남녀는 대학시절 건축학개론 강의실에서 처음 만났다. 한 동네 친구로 우정인지 사랑인지 마음만 졸이다 사소한 오해로 헤어졌다가 중년에 재회한다. 대학시절을 연기한 이제훈과 수지보다 중년을 연기한 엄태웅과 한가인을 우선 기억하는 관객은 드문 것 같다. 희미한 과거인데 현재보다 선명하다. 채도는 낮으나 명도는 높은 플래시백 서사......



단조로이 반복되는 일상, 포기하고 돌아선 것들에 익숙해진 사람들에게 첫사랑의 기억은 과거여도 초록빛 추억을 싹 틔운다. 가슴에 안고 다니기만 하고 자세히 읽지 않았던 무거운 개론서, 교양과목 수업에서 본 다른 학과 여학생을 좋아했던 보편적인 기억은 주인공의 기억의 커튼을 열고 들어와 고유한 이야기가 된다. 첫사랑이 아리게 남는 것은 ‘지금 알고 있는 것을 왜 그때 알지 못했을까’ 하는 회한과 후회 때문인가.



음대생 서연과 건축학과 승민은 지리적으로 정릉이라는 한 동네에 살지만, 심리적으로는 다른 세계에 산다. 적어도 승민은 그렇게 느낀다. 서연은 거침없이 승민의 마음의 빗장을 열고 들어와 작은 꽃을 심지만, 승민은 서연의 말과 행동이 무슨 의미인지 정확히 알 수 없어 동요한다. 나와는 다른 세계를 동경할 때, 감정을 지배하는 것은 의심과 불안일 수밖에.



그러니 재수생 친구 납득이에게 ‘여자아이가 이러는 건 무슨 뜻이야?’ 수시로 연애 과외를 받는 것이다. 납득이는 유려하고 현란한 설명으로 ‘여자아이들이란 말이야’ 하고 승민을 가르쳐보지만, 그렇게 확인된 일반 여자아이들의 마음을 서연에게 대입시키려 하지만, 승민에게 그의 사랑은 일반화될 수 없어 특별하다. 그래서 그는 다시 더욱 불안해진다. 불안의 방어기제는 의심과 분노이고, 이 불안을 부추기는 이유는 서연의 세계와 마주하는 자신의 상대적인 가난에 있다.



부유한 방송반 선배가 승민이 입고 있는 짝퉁 브랜드 티셔츠를 놀릴 때, 서연이 건네준 CD를 재생할 CD 플레이어가 집에 없을 때, 냉장고 곳곳에 순대국밥집을 하는 어머니가 버리기 아까워 넣어둔 음식 조가리 봉지들이 우르르 쏟아질 때, 승민은 짜증을 내고 대문을 걷어찬다.



오랫동안 몸을 담그고 살았던 일상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끝내 승민은 이 불안의 끝에서 결국 서연에게 거친 말로 관계를 단절할 수밖에 없다. “우리 집에는 CD 플레이어가 없어서 이걸 들을 수 없어.” 자조적인 선긋기, 가장 편한 방법은 자신이 잠겨있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다. 우연히 발견한 빈 집 대청마루에 잠시 앉아 있을 때도 분할된 그들의 세계처럼, 결국 두 사람은 서로 쉴 마음의 집을 짓지 못한다.



승민의 짜증을 받아넘길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그 세계에서 악착같이 살아온 그의 어머니뿐이다. 오늘도 승민의 밥은 으레 순대국. 시장 다른 아낙의 돈을 좀 꿔달라는 청을 매몰차게 거절하는 대화도 평생 들어온 반찬이다. 서연이 어느 날 같이 순대국을 먹자고 할 때, 승민은 먹을 줄 모른다고 거짓말을 한다. 오히려 서연이 ‘남자가 그것도 못 먹느냐’고 면박을 준다. 서연에게는 가끔 먹는 서민적인 음식이지만 남들의 속풀이 음식을 밥으로 먹고 자란 승민은 첫사랑에게 자기의 일상을 공유하지 못한다. 그러나 수십 년 후 재회한 그들 앞에 놓인 고가의 와인 샤또 안젤루스는 지난날 정릉 시장통의 진한 국물을 이기지 못한다.



순대국은 진한 사골 국물에 순대를 넣은 국. 순대는 여린 것에 온갖 것을 넣은 음식이다. 돼지 창자에 소를 넣어서 만드는데 내장 중에서도 질기지 않고 부드럽다는 소창을 쓰기도 한다. 우선 소금물로 소창의 안팎을 깨끗이 씻어야 냄새가 나지 않는다. 그 안에 소를 채우는데, 소의 양이 일정해서 모양이 균일해야 보기 좋은 순대가 된다. 각종 야채를 다져 넣고, 들깨와 찹쌀도 갈아 넣고, 삶은 당면과 선지를 적절히 섞어서 두툼하게 만든 다음 양쪽을 실로 잘 묶어 삶는다. 생강, 한약재 등을 넣어 첫 여린 창자가 올라오지 않게 향을 누른다. 진하게 우린 사골에 삶은 순대를 올려 후루룩. 잘 묶고 잘 다스려 먹는 음식이다.



문득 음식을 만드는 과정이 삶을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지난 시간 떠오를 때면 허기처럼 찾아오는 사람. 국밥 한 그릇 넘기고 다시 길을 간다. 그 시절, 그 사람, 함께 지은 마음의 집이야 누가 허물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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