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내린 눈. 미완성으로 두었던 과거의 틈새를 눈이 채웠다. 이와이 슌지의 1995년 영화 <러브 레터>를 다시 보는 겨울
히로코는 3년 전 산에서 조난사고로 세상을 떠난 약혼자 이츠키의 3주기 행사에 참석하러 왔다. 영화 첫 장면에서 그녀는 눈 위에 한동안 숨을 멈추고 누워있다.
우연히 약혼자의 방에 들어갔다가 어머니가 꺼내 준 중학교 앨범을 본 그녀는 다시 그와 하나가 되고 싶다. 연인이 중학교 때 살았던 작은 마을은 지금은 국도 공사로 흩어진 옛 마을이다. 그녀는 동맥이 지나가는 손목 안쪽에 몰래 주소를 적는다. 편지를 보내자. 아무도 답을 할리 없다. 그래도 답장이 오지 않을 편지라도 보내보는 것이다. 기적처럼, 이츠키 이름으로 답장이 왔을 때, 그녀는 애인이 살아 돌아온 것처럼 흔들린다.
어느 날 뜬금없이 히로코의 편지를 받은 이츠키는 히로코의 약혼자와 동명이인인 중학교 여자 동창이다. 히로코의 편지를 통해 잊었던 중학교 동창을 기억해내고, 아주 세세히 이츠코의 학창 시절을 편지로 적어 보낸다. 히로코는 그렇게 말 수 적던 연인을 픽셀의 망점 하나하나 채우듯 그녀가 모르던 연인의 확장된 시간을 채워나간다.
이츠키는 히로코에게 알려주기 위해, 묵은 기억의 창고를 뒤진다. 우연히 실수로 받은 그의 영어 시험지를 전해받은 히로코는 더욱 적극적으로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보내 연인이 다니던 학교 교정을 찍어 보내달라고 부탁한다. 그 두 사람은 힘을 합해 죽은 이츠키의 기억을 완성한다.
여자 이츠키 역시 히로코에게 말하지 못한 비밀이 있다. 죽은 이츠키와의 시간이다. 그녀 역시 그와의 시간이 있었다. 이츠키가 묘사하는 연인의 기억을 읽는 히로코는 감지한다. 약혼자의 어머니에게 “혹시 내가 이 여학생과 닮았어요?” 묻는 장면에서 그녀는 대답을 원치 않아 보인다.
영화 속 다른 인물들 역시 말하지만 말하지 않는다. 늘 티브이 리모컨만 쥐고 살던 무심한 할아버지는 손녀의 생명을 살리고 나서야 처음 손녀 이름의 나무를 심었던 사실을, 늘 마음에 있었음을 이야기한다. 이츠키가 동창 남학생 이츠키의 죽음을 알게 되는 과정도 히로코가 아닌 학교 선생님을 통해서다. 그들은 왜 그때 마음을 말하지 않을까?
남자 이츠키가 여자 이츠키를 몰래 좋아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오랜 시간이 흘러 도서관 후배들이 알려준다, 대출 카드 뒷면에 그려진 그림을 받아 들고, 이츠키는 그제야 자신의 첫사랑을 확인하며 이 기억의 조각만은 히로코에서 보여주지 않고 조용히 마음에 품는다.
기억하고 싶은 것만을 기억하기에, 기억 저변의 시간은 뒤늦은 통증이다. 사람들은 아프지 않으려 퍼즐 조각을 비워둔다. 그러다가 어느 날 문득, 눈 같은 것이 내리고, 빈 틈이 채워지고, 이야기의 지층이 비로소 수면 위로 드러날 때, 아무렇지도 않은 듯 눈사람을 만들거나 눈싸움 같은 것을 하거나 뜨끈한 음식을 먹는다.
흰 눈을 보며 생각한다. 저 순결한 상태로 그대로 둘 것인가. 누구보다 먼저 달려 나가 내 흔적을 남길 것인가. 그저 눈발 같이 수많은 안부를 전할 것인가. 아니면 그저 커튼을 내리고 따스한 나베 주위에 모여 앉아 헛헛히 납작한 나무 국자에 자작하게 국물을 마실 것인가. 덮고 덮은 겨울 이야기는 그런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