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을 다른 말로 ‘식구’라 한다. 마주 앉은 반복된 밥상의 세월은 무겁다. 벗어나려 해도 가족이라 벗어날 수 없고, 가까이하려 해도 가족이라 어색하다.
일본 고레다 히로카즈 감독의 2008년 영화 <걸어도 걸어도>가 보여주는 광경은 익숙하다. 오랜만에 한 자리에 모인 가족이 꽤 어색하게 보내야 했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 하나, 많은 일이 일어난’ 1박 2일의 이야기. 전형적인 따뜻한 가족 이야기를 향해 왔다가, 부드러운 천인 줄 알고 허투루 만지다 날카롭게 손 끝 베이고 돌아가는 뒷맛. 대단한 것을 찾아 떠나기보다 익숙하고 평범한 것을 다루는 히로카즈 감독의 시선은 주제, 소재뿐 아니라 몹시 사소한 카메라 앵글이나 편집에서 사소한 듯 숨어 있어 거듭 보게 하는 묘미가 있다.
몇 해 전 익사 사고로 세상을 떠난 큰 아들의 기일. 오랜만에 흩어져 살던 가족들이 모였다. 올해는 반갑게도 둘째 아들이 결혼한 아내와 아들과 왔다. 의사였고 여전히 의사임이 자랑스러운 완고한 아버지 앞에 기대에 맞지 않는 직업에, 애 딸린 여자와 결혼한 아들은 편할 리 없다. 형에 눌리고, 아버지에 눌리고, 그의 삶은 무엇도 빛나지 않는다. 빛 대신 오기로 버티는 밥상은 으레 황망하게 끝나게 마련이다. 반기는 어머니와 여동생 사이로 등을 돌리고 앉은 아버지의 뒷모습, 더 이상 힘으로도 장정인 아들을 이기지 못할 늙은 아버지를 아들은 왜 여전히 두려워하는 것일까.
평생 작은 마을 의원의 의사였던 아버지, 평생 의무와 책임을 다 했던 삶, 그 정도의 노고라면 두 아들 중 하나쯤은 의사가 되어 가업을 이어주어도 되지 않은가. 그래서 형의 빈자리에 앉은 둘째 아들은 존재 만으로도 떳떳하지 못하다. 형은 빛나는 사람이었다. 늠름했던 장남은 아버지가 보기에 한 없이 무능한 청년을 구한다고 물에 뛰어들었다가 세상을 떠났다. 해마다 아들의 기일이면 덕분에 목숨을 부지하게 된 청년이 무릎을 꿇고 사죄와 감사의 말을 반복한다. 살아있음을 만끽하려 작정이라도 한 것인가. 해마다 눈에 띄게 불어나는 몸집, 땀에 잔뜩 젖은 셔츠, 아직도 취업 준비 중이라는 말, 하나에서 열까지 아버지는 못마땅하다. 저런 생명을 위해 목숨을 던진 어리석은 미련한 아들.
청년이 떠나고 여인들이 음식과 설거지에 분주한 동안, 말끔히 치워진 상 앞에 남은 아버지와 형의 대역 둘째 아들은 시선과 대화 모두 어긋나고 미끄러진다. 아들은 자기가 하는 모든 일은 어차피 아버지에게는 실패와 동의어임을 알고 있다. 지금 하필 실직 중이다. 아내와는 차라리 부모님을 모시고 살며 유산을 받는 것이 어떤가 고민하고 있다. 그래서 꽤 오래 가족이 오가는 밥상을 담고 있던 카메라는 아버지가 ‘그래, 밥은 먹고 사냐’ 물을 때 불쑥 아버지의 단독 샷으로 바뀔 때 아들은 '애 딸린 여자 하나는 먹여 살릴 수 있다'라고 퉁명스레 대꾸하고, 그의 등 뒤에는 죽어서도 잘난 형 영정이 웃고 있다.
팽팽한 긴장의 관계에는 으레 눈치 없이 대화에 끼어드는 사람이 오히려 고맙다. 자동차 외판원인 매형이 카탈로그를 들고 와서 결혼도 했으니 처남도 이 참에 패밀리카 한 대 구입하라고 할 때, 분주하던 어머니는 처음으로 ‘아들이 태워주는 차 한번 타고 싶었다’고 지나가듯 말한다. 부모의 말에 자식이 그러하듯, 아들은 지나가는 말을 귀담아듣지 않는다.
어머니의 말을 누가 귀에 담아 듣는가. 딸, 아가씨, 아내, 엄마가 되어 살다 갈 그들의 이야기는 늘 그렇듯 허공에 흩어진다. 아버지의 심사가 얼굴에 여실히 드러나는 것과 달리 먼 길을 찾아온 아들 가족을 반기고, 아들 대신 살아남아 죄송하다 연신 사과하는 청년을 위로하고, 능숙하고 단련된 솜씨로 늘 그 자리를 지켜온 말 없는 어머니가 처음 무엇인가를 원했다는 것을 아무도 기억할 리 없다.
앞에서 이 영화가 부드러운 명주천을 만지다 베이는 느낌이라 한 것은, 영화가 진행되며 이 가족이라는 덩어리가 서서히 개인이라는 딱딱한 조각으로 쪼개지기 시작하는 후반의 이야기에 있다. 마치 위의 것으로는 아래 지층을 알 수 없는 소복한 덮밥처럼 말이다. 내 몫의 밥의 바닥을 보아야 일어날 수 있는 좁은 밥상......끼어 앉은 가족은 벗어날 수 없는 정적 속에 덮밥을 먹는다. 귀한 손님을 위하여 종일 음식을 준비한 어머니가 처음 수십 년 숨겨 두었던 이야기를 꺼낼 때부터 정적은 더 무겁다.
반복되는 사소한 밥상머리 대화에서 가족은 무엇인가를 포착하고 정확히 그것이 무엇인가를 알지 못한 채 이튿날 뿔뿔이 흩어져 일상으로 돌아간다. 외관상 그들이 모이기 전과 후 같은 모습이기에 1박 2일 사이에 겪은 감정의 골을 알고 있는 이는 관객뿐이다.
어머니가 아들 만나 재혼한 새 며느리에 대해 숨기지 못하는 반감, 피 한방을 섞이지 않은 손자가 병원 진료실 도구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반가운 할아버지, 부모님에게 절대 잘난 형을 대신할 수 없는 아들임을 확인하고 한동안 집에 가지 말자 아내에게 투덜대며 집으로 가는 아들, 다른 손주들과 자기 아들을 달리 대하는 시부모가 여전히 불편한 며느리, 처갓집 광대 노릇에 피곤한 사위 등 각각의 개인이 밥상 앞에서 어설프게 가족으로 버무려지는 과정을 반복하여 보고 있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화목한 것처럼 행동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쌀알처럼 흩어지는 가족이기에 공감할 수밖에 없는 헛헛함이 있다.
가족은 한발 늦다. 알면서도 계속 늦게 간다. 함께 바라보는 바다를 향해 각자 계단을 오를 뿐이다. 그래서 마주한 밥상에서 눈을 맞추지 않았던 아버지와 아들이 끝내 야구장에 가지 못할 때, 가족을 버스 정류장에서 배웅하고 말없이 집으로 돌아가는 부모가 닿지 않는 별이 될 때 마음에 비슷한 돌덩이를 삼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