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오랜만이에요"

<만추>의 커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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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장례식을 위해 사흘 휴가를 받아 교도소 밖으로 나온 영화 ‘만추’의 주인공 애나는 말 수가 적다. 칠 년 만에 고향집을 찾은 ‘살인범’을 맞이하는 가족들은 피차 어색한 침묵을 피하기 위해 차를 권한다. 어머니 장례식에서 옛 연인 왕징 부부와 원탁에 앉아 이야기를 나눌 때도, 서로 연거푸 상대방과 제 잔에 차를 채우며 어색함을 감춘다.


애나는 사흘의 자유가 즐거운 일이 아니다. 해방이 아닌 또 다른 감옥, 단지 격리되었을 뿐인 과거와 재회해야 한다. 한 때는 재기 발랄해서 누구든 말을 걸고 싶어 하던 아가씨였다는 사실 조차, 애나를 어린 시절부터 오래 깊이 알아온 왕징이나 기억할 정도다. 명민했던 애나를 지금 이 상황에 이르게 한 장본인인 왕징은 아직도 그녀를 탐스럽게 훔쳐보고 있다.



그럴 것이면 떠나지 말던지, 번듯한 가정을 이루고서도 애나를 잊지 못해 같이 떠나자고 한 지독한 사랑은 그렇다 쳐도, 그로 인해 의처증 환자인 남편의 폭력을 견디다 못해 살인을 저지른 애나의 삶은 이제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넜다. 참혹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무표정한 애나의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에서 광채를 뿜는 눈길은 미련하게도 왕징을 따라 지난날에 머문다.


첫 장면에서 남편을 엉겁결에 살해하고 멍 투성이의 얼굴로 새벽 주택가를 달리는 장면부터, 마지막 고속버스 휴게소에서 훈을 기다리며 창가에 앉아있는 장면 내내, 애나는 칙칙하고 꺼칠하다. 옷 가게를 지나며 충동적으로 원피스와 붉은 립스틱을 사고, 7년간 막혀있던 귀걸이 구멍을 힘겹게 뚫어 치렁치렁한 귀걸이를 걸고 거리를 나서다 교도소의 위치확인 전화를 받기 전까지가 전부다.


감옥에서 나왔으니 예쁜 옷 한번 입어보고 싶었다가 현실을 보는 것이다. 버스 매표소 앞에서 줄을 섰다가 행선지를 묻는 직원에게 할 말이 없어 다시 줄을 서기를 반복하는 것도 같은 마음일 것이다.



안개 자욱한 시애틀행 버스에서 우연히 만난 애나와 훈은 영화 내내 별로 말을 나누지 않는다. 오히려 상대에 대해 알고 싶어 하지 않아 보인다. 묻는다고 대답하는 것도 아니고, 묻지도 않은 것을 말하기도 한다. 한국 남자와 중국 여자니 익숙한 언어도 다르다. 훈과 하루 중일 시간을 보낸 애나가 내일이면 교도소로 돌아간다고 했을 때, 훈은 그 이유를 묻지 않는다.


애나가 그녀의 삶에 있었던 있었던 일을 영어가 아닌 중국어로 말할 때, 훈은 유일하게 아는 중국어 단어인 호(좋아), 하이(나빠)로 번갈아 응수하는데, 이야기와 응수는 마치 아주 오래된 소통 같이 느껴진다. 언어 저편의 그 무엇, 두 사람만 통하는 ‘어디서부터 잘 못 되었는지 모르는’ 떠돌이의 언어 같은 것이다.


그 언어의 세계에서는 진실인가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안개를 달리는 고속버스에서 ‘거리의 남자’인 훈은 시애틀에 식당을 오픈하러 왔다고 하고, ‘죄수’ 애나는 중국에서 헤어숍을 하고 있는데 잠시 들른 것이라고 한다. 놀이공원에서 이름 모를 연인의 이별을 바라보면서 복화술로 대화를 지어내기도 한다. 모두 진실이고 모두 거짓이다. 그저 그때 그가 하는 말이 진실이다.



이 어정쩡한 소통 안에서 애나는 훈의 아내가 되고, 그날은 훈의 생일이 되며, 이내 두 사람은 버스 정거장에서 처음 만난 사람들인 양 인사를 나눈다. 즐거우면 그뿐이다. 시간과 현실과 환상의 혼재 안에서 그들은 관광객처럼 자신을 구경한다. 어차피 그들은 현실 속에서도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관광객 아니던가? 그러나 이 짧으나 치명적인 게임을 통해 애나는 서서히 밝고 건강했던 본래로 돌아갈 수 있는 에너지를 찾는다.


영화 내내 차를 마시며 사람들과 대화를 피하던 애나는 훈과 있을 때는 차를 마시지 않는다. 훈에게 처음 마음을 연 날에는 처음 두 잔의 커피를 산다. 2년 후 출소 일에 다시 만나기로 한 약속대로, 휴게소 커피숍 창가에서 앉아있는 그녀는 다시 게임의 연장선 앞에 있다. 이번에는 게임의 주인공이 올지 안 올지 모르는 꽤 난이도 높은 것이기에, 그녀는 수시로 열리는 문 쪽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후후 커피잔을 불고 있을 뿐, 정작 한 모금도 마시지 않는다.



커피잔이 유난히 크고, 먹지 않을 것이 분명한 큼직한 케이크가 놓인 것을 보아 그녀도 이미 알고 있는 것 같다. 그래도 “참 오랜만이에요” 그 사람에게 건넬 인사말을 연습하며, 지어본 지 오래되었을 미소를 짓는 것이다. 다시 웃게 해 준 사람은 대부분 돌아오지 않는다. 빈자리를 선물로 남긴 사람. 지켜보는 시선을 믿고 길을 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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