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틀랜드 에어스트림 12일 살기 일정 중 4일을 샌프란시스코에서 보내게 되었다. M이 마침 이 기간에 사진팀과 영화 제작 워크숍 일정이 잡혔는데, 내가 에어스트림 트레일러에 혼자 남으면 차도 없이 옴짝 달싹을 못할 것이니 샌프란시스코에 같이 가자고 했다. 묻지도 않고 이미 여행에 넣어둔 상태. 내가 샌프란시스코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몇 해 전 함께 이 도시를 여행했기에 잘 알고 있어서일까.
샌프란시스코 거쳐 포틀랜드 도착한지 하루만에 난데없이 다시샌프란시스코로 제자리하긴 했지만, 깍두기로 따라간 덕분에 편안한 비행기에 유서 깊은 호텔에서머물 수 있었다.
언젠가 온종일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SF MOMA)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꿈이라 노래를 했었는데, 야호!M이 종일 워크숍에 있는 동안 혼자 소원 풀어보라고 SF MOMA에서 걸어서 5분 거리의 숙소를 예약해 주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3일간 머문 숙소는 팰리스 호텔(Palace Hotel)이다. 팰리스 호텔은 1875년 미서부 해안에 오픈한 최초의 그랜드 호텔(Grand Hotel)이다. 그랜드 호텔은 고급의 웅장한 호텔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역사적으로, 사회적으로 중요한 호텔을 의미하는 상징적인 용어라고 한다. 예를 들어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공간과 손님들 분위기를 연상하면 된다.
팰리스 호텔은 금융 지구(Financial District) 내의 마켓스트리트에 자리 잡고 있다. 이 지역은 샌프란시스코의 경제적 중심지로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건물들이 많이 위치해 있다. 특히 1906년 대지진 이후 재건된 건물들이 많으며, 그래서 고전적인 건축 양식과 현대적인 고층 빌딩들이 공존하고 있다. 전 세계의 사진가들이 이곳에서 시간이 혼재된 스카이라인을 찍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건물이 팰리스 호텔이다.
그랜드 호텔로 구분되는호텔은 대개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에 설립된 경우가 많다. 이 시기에 자동차, 철도 등의 교통수단이 발달하면서 부유한 계층의 관광 인구가 급증했고, 그에 따라 고급 숙박시설의 수요도 증가했다. 그들은 여행지에서 독특하고 고유한 경험을 원했다. 호텔은 앞다투어 고급 레스토랑, 바, 스파, 컨시어지 서비스 등을 갖추어 귀빈과 상류층을 대상으로 한 서비스에 집중했다. 그랜드 호텔은 온갖 '있어 보이려는 사람들'의 사교 모임, 중요한 정치적 회담, 연회 등 다양한 사회적, 문화적 활동이 열리는 곳이었다.
팰리스 호텔의 건축은 응당 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한 스케일과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다. 이 건물은 부유한 사업가 윌리엄 채프먼 랄스턴(William Chapman Ralston)이 당시 놀라운 높이인 10층 건물로 건축했다. 객실만 800개, 마차를 위한 실내 공간, 최초의 실내 스프링클러 시스템까지 갖춘 엄청난 규모였다고 한다. 호텔은 당시 혁신적인 철골 구조를 사용해 내진성을 높였는데, 그래도 1906년 샌프란시스코 지진과 화재에서 완전히 살아남지는 못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비록 원래 건물은 손상되었지만, 철골 구조 덕분에 완전히 무너지지 않았고 1909년부터 리모델링을 거쳐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다.
리모델링 건축가는 오리지널 호텔의 웅장함을 유지하면서도 대칭성, 장식성, 기둥, 아치, 돔 같은 요소들을 가미했다. 이것을 보자르(Beaux-Arts) 스타일이라고 하는데 프랑스의 파리 국립미술학교(Ecole des Beaux-Arts)에서 이름을 딴 건축 양식으로, 고전적인 그리스와 로마 건축 요소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스타일이다.
1906년 샌프란시스코 지진 이후 도시 재건 과정에서, 많은 건물들이 보자르 스타일로 지어졌는데, 전문가들은 당시 지진과 화재의 기억에서 벗어나 더욱 번성하고 발전하려는 이 도시의 시대정신의 표현이라 해석하기도 한다. 이후 팰리스 호텔은 샌프란시스코의 역사적 랜드마크로서 지역의 경제적 번영과 사회적 발전을 상징하는 랜드마크로 자리 잡아, 도시의 역사와 함께 발전해 왔다.
이곳이 이 호텔의 시그너처 가든 코트(Garden Court)다. 유리 돔과 대리석 기둥으로 장식된 대형 실내 공간이다. 자연광을 최대한 활용하기 때문에 개방감이 있고 아름다운 샹들리에와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돋보인다. 팰리스 호텔의 역사적인 순간들은 모두 이 공간에서 이루어졌다.
투숙하지 않더라도 이 유리 천장과 대리석 기둥으로 장식된 이 눈부신 배경으로 브런치와 애프터눈 티를 즐길 수 있다. 달그닥 달그닥 화려한 마차들이 도착하는 그랜드 호텔의 활기를 상상하며 상징적인 샌프란시스코의 시간을 누려볼 만하다. 엘리자베스 여왕, 윌슨 대통령, 처칠 수상, 클린턴 대통령 등 세계 정상이 머문 곳, 금발의 마를린 먼로가샴페인을 마시던 곳, 프랜시스 코폴라 감독의 영화 <아웃사이더>와 사랑스러운 <나니아 연대기>가 촬영된이야기 공간으로 들어가는 경험을 하고 싶다면.
나는 호텔의 건물 외부, 로비, 복도뿐 아니라 1층 끝에 위치한 <Landmark 18>을 통해서 이 호텔의 역사를 짐작해 볼 수 있었다. 특히 < Landmark 18>은 팰리스 호텔의 역사와 유산을 보존하고 기념하는 특별한 아카이브 공간으로, 호텔의 역사적 기록, 유물, 기념품 등 호텔의 문화적 유산이 가득한 보물 같은 공간이었다.
<Landmark 18>에는 호텔의 건축, 재건, 그리고 그 이후의 주요 사건들을 기록한 사진과 문서들이 보관되어 있었는데 1906년 샌프란시스코 지진 이후 재건된 호텔의 설계도와 재건 과정의 기록들도 있었다. 호텔을 거쳐 간 유명 인사, 정치가, 왕족 등의 기록, 그들의 방문과 관련된 다양한 자료도 볼 수 있었다. 심지어 공사 중 철거한 과거의 건물 조각 일부까지 집요하게 기록으로 남겨 보존한 과정이 놀라웠다.
그리하여 결론은 이렇게 호텔 안에서 부지런히 돌아다니느라, 이 유서 깊은 럭셔리 호텔에서 셀카 한 장도 못 찍었다는 슬픈 이야기다. 그나마 포토샵이 있어 다행이다. 19세기 그랜드 호텔 가든 코트 사진 한가운데 내 독사진을 합성해서 넣을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