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스토리마이닝, 일상적 서사가 광산이다
건축에서 '이벤트 밀도'라는 개념이 있다. 같은 공간이라도 그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밀도에 따라 공간의 성격이 달라진다는 뜻이다.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같은 일상이라도 그 속에서 얼마나 깊이 느끼고 생각했느냐에 따라 이야기의 밀도가 달라진다.
매일 지나치는 길모퉁이에서 누군가는 삼십 년 만에 첫사랑을 만난다. 누군가는 삶을 비관하여 자살을 고민하던 순간 지나가던 행인의 도움으로 다시 살아 보겠다는 용기를 얻는다. 누군가는 텔레마케터의 보험 권유 전화를 받고 운명의 짝을 만날 수도 있다.
겉보기에는 똑같은 공간, 똑같은 시간이지만 각자에게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다. 문제는 그가 이 사건들을 소리 내어 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묵묵히 조용히 생업에 매달려 살아가는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질문을 받아야 말한다. 그러니 질문은 그들이 품고 있던 기억의 문을 여는 열쇠다.
당신은 이해했다. 사실(Fact)은 이야기의 뼈대이고, 질문은 그 사실에 감정으로 살을 붙여야 이야기가 된다는 것을. 그래서 질문은 구체적이어야 한다. "어떤 일을 하세요?"라고 물으면 처음엔 직업을 말한다. 하지만 이어서 "일하면서 가장 보람을 느꼈던 순간은 언제였나요?"라고 물으면 전혀 다른 대답이 나온다.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을 정리해서 말하는 데 익숙하지 않다. 그냥 살아왔을 뿐이니까. 일상적으로 사람들은 보통 자신의 감정을 숨기려고 한다. 특히 한국 사람들은 더 그렇다. "힘들었어요"라고 말하면서도 구체적으로 어떻게 힘들었는지, 그 힘듦이 어떤 감정이었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적절한 질문을 받으면 기억 속에 묻혀 있던 순간들이 하나씩 떠오른다. 마치 오래된 사진첩을 뒤적이는 것처럼. 하지만 진짜 이야기는 바로 그 감정 속에 있다. 슬픔도 여러 가지다. 이별의 슬픔과 이사의 슬픔과 시험에 떨어진 슬픔은 모두 다르다. 그 차이를 찾아내고 표현하는 것이 스토리마이닝의 핵심이다.
"가장 맛있었던 음식이 뭐예요?"라고 물으면 대부분 메뉴 이름을 말한다.
하지만 "그 음식을 먹을 때 누구와 함께 있었고, 어떤 기분이었나요?"라고 물으면 음식보다 더 중요한 이야기들이 나온다. 할머니와 함께 먹었던 손칼국수 이야기, 첫 월급으로 부모님께 사드린 고기 이야기, 지갑을 잃어버려 헤매다 땅에 떨어져 있던 천 원짜리를 주워 허겁지겁 먹었던 컵라면 이야기까지.
학문적으로는 '내러티브 연구'라는 분야가 이미 존재한다. 하지만 이는 주로 학자들의 연구 영역이고, 일반인들이 접근하기에는 다소 어렵다. 스토리마이닝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실용적인 방법이다. 복잡한 이론이나 전문 지식이 필요 없다.
그럼 기자들처럼 인터뷰를 하면 될까? 그것과는 다르다. 기자들의 인터뷰는 특정한 정보를 얻기 위한 목적이 있다. 스토리마이닝은 그 사람 자체에 대한 호기심에서 시작한다. 무언가를 얻으려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의 이야기를 온전히 들어보고 싶은 마음에서 출발한다. 그럼 심리 상담인가? 그렇지 않다. 심리상담은 문제 해결이 목적이다.
스토리마이닝의 목적은 정보도 아니고 치료도 아닌 상호 변화 경험이라 할 수 있다. 스토리마이닝은 마주 앉은 사람에게 문제가 있다고 가정하지 않으며, 그 사람에 대한 질문을 통해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이전과 다른 무엇을 경험하는 것이 목적이다.
이야기를 하는 사람에게는 자기 이해의 깊이가 생긴다. 평소에 의식하지 못했던 자신의 패턴이나 가치관을 발견하게 된다. "내가 이런 사람이었구나" 하는 깨달음이 온다. 이야기를 듣는 사람에게는 타인에 대한 이해가 깊어진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해 보였던 사람도 이야기를 들어보면 놀라울 정도로 깊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스토리마이닝이 확산되면 서로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는 사회가 될 수 있다. 지금은 너무 빨리 판단하고 결론을 내리는 세상이다. SNS에서 몇 줄의 글만 보고 그 사람을 다 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진짜 이해는 이야기를 들어봐야 가능하다. 사람마다 다른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다름을 틀림으로 보지 않게 된다. 그럴 수 있다.
그렇게 해서 발굴한 글의 몇 가지 사레다.
각종 다단계 사기 당하고 다니는 목사님 A님
노인정에서 스페인 할아버지와 연애하며 스페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게 된 할머니 B님
마누라(!)와 부산 해운대 시장 파전집 앞 줄 서있다 첫사랑 만나 갈등하는 아재 C님
친구 따라 평창동 갤러리 가서 식사하다 동전 물티슈를 마시멜로인 줄 알고 삼킨 D님
평범한 사람들이 달리 보인다. 일상이 서사로 보인다. 영화보다 재미있다. 만나보고 싶은 그가 어쩌면 옆집 사람일 수도 있는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