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잘못이 아니다"

<바다 마을 다이어리>의 매실

by note by








오래된 그 집 정원에 매화나무가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처음 그곳을 찾은 손님뿐이다. 해마다 정원의 매실을 따서 단맛, 신맛의 술을 따로 담그는 전통을 이어가는 이 집 세 자매...아버지의 기억을 제외하면 긴 추억이 많다.


아버지 얼굴을 본 지 15년. 그러니 어느 날 날아온 부고도 반갑지 않다. 낯선 도시에서 세 번째 결혼한 여인과 살고 있던 아버지 장례식에 가야 할까? 영화 <바다 마을 다이어리> 이야기다.





억지로 찾은 장례식장에서 아버지의 두 번째 결혼에서 태어난 이복 여동생을 만난 세 자매는 이내 알 수 없는 친근감을 느낀다. 이기적인 새엄마 대신 실제 아버지의 병상을 지켰던 어린 소녀에 대한 애틋함으로 세 언니들은 함께 살지 않겠느냐고 조심스레 묻는다.





오랜 세월 아버지를 빼앗았던 여인의 딸을 받아들인 언니들에게 경계심과 조심성 사이를 오가던 소녀는 매실주를 계기로 부쩍 가까워진다.


언니들이 담근 매실주를 마셔보고 싶어 홀짝대다 취해 곯아떨어진 밤, 세 언니들은 잠든 이복동생의 얼굴을 처음으로 찬찬히 내려다본다. 귀가 닮았거나, 점이 있거나, 속눈썹이 길다며 낮은 소리로 분주히 속삭이며.





매실은 도수가 높은 증류식 소주 등 술을 담가 만든다. 단맛을 내기 위해 화이트 와인을 섞기도 하고 일본에서는 브랜디에 설탕을 넣어 담그기도 한다. 동글동글하니 5월 말에서 6월 중순에 녹색 열매를 맺는 매화 열매는 노랗게 익기 전에 수확하는데, 익어 떨어지면 썩어 녹아내리며 액체가 된다.





그래서 떨어지기 전에 하나하나 조심스레 따야 한다. 무더운 여름 제 손으로 매실을 따 담은 매실주가 얼마나 향긋하겠는가. 언니들은 여중생 막내에게 이름을 이쑤시개로 콕콕 매실에 박아 처음 담근 매실주를 기념할 수 있게 해준다. 그렇게 막내도 첫해 여름 제 몫의 추억을 매실에 새기며 가족의 문턱을 넘는다.





그들의 집 매실주를 저장하는 곳에는 같은 모양의 붉은 뚜껑 병이 나란히 가득하다. 각각 세월과 맛이 다르다. 담근 사람도 다르다. 그래서 막내가 언니들에게 ‘매실주를 마시겠냐’ 물을 때, ‘단맛? 신맛? 묽게? 연하게?’ 꽤 깐깐하게 묻게 되고, 언니도 참을성 있게 끝까지 제 취향을 답하며 그 사이사이 웃음과 이야기가 오가는 것이다.





매실은 소화를 잘 되게 해주고, 열을 내리게 한다. 체했을 때도 속을 편하게 한다. 해독성이 있어, 맺힌 것을 내려가게 한다. 독주를 즐기지 않는 여자들의 술이다.


영화에서 줄곧 등장하는 매실은 가족이 된 네 자매의 관계가 어떻게 익어 가는지 보여준다. 영화 이후 그들이 결국 행복하게 잘 지냈다거나, 결국 이해하지 못하고 물과 기름이 되었다거나 하는 엔딩은 구태여 필요하지 않아 보인다.




그들의 일상이 영화와 크게 다르지 않게 하루하루 잔잔히 계속되었을 것 같다. 책임감 강한 맏언니, 늘 남자에게 차이곤 하는 정 많고 철없는 둘째 언니, 아버지를 닮아 낚시를 좋아하는 셋째 언니 속에서 속 깊은 막내 아사노의 삶도 바다 마을 가마쿠라에서 그렇게 계속되었을 것이다.


매일 음식을 만들고, 여름이면 매실을 따고, 저녁이면 고다쯔에 서로 발을 넣고...... 회사에서 생긴 일, 학교에서 생긴 일, 연애에 대해 웃고 떠들며 그렇게 또 하루를 보내는 일기 같은 삶. 같은 상처를 가진, 어쩔 수 없이 독립한 ‘작은 아씨들’ 사이의 전우애.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말을 건네는 언니들을 바라보며 소녀는 정원의 매실나무처럼 성장한다. 뽀송뽀송한 솜털이 이는 매실에 여름마다 뾰족한 이쑤시개로 제 이름을 새긴다. 그렇게 오래된 작은 집 한편에 소녀의 매실주가 조용히 익어간다.


이 모든 가족의 관계를 조용히 지켜보는 큰언니는 해마다 늘 남은 매실로 장아찌를 만들 것이다. 통째로 소금에 절이되 간호사답게 염분을 적게. 말괄량이 두 동생들은 싱겁다고 투덜대겠지. ‘가족’ 모두 장아찌 맛이 변치 않을 것임을 이미 알고 있을 것이고.




중요한 것은 변치 않는다. 사람이거나 장소이거나 결국은 돌아갈 그곳이 집이다.


자칫 익어 떨어져 버리기 전, 천천히 사다리를 올라 하나 하나 따 모은, 내 이름을 새긴 탐스러운 매실이 있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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