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하기 어려운 가치관
전반적으로 싱가포르의 삶은 만족스러웠다. 물가는 높지만 이를 상쇄할 정도의 급여(준수한 급여 + 낮은 세금 = 높은 실수령액)를 받을 수 있었고, 극강의 편의성이나 여행 인프라 덕분에 즐겁게 생활할 수 있었다. 누군가 싱가포르 이주를 고려한다면 실리적인 측면에서 충분히 추천할 수 있다. 다만, 이곳에 지내면서 다소 불편한 감정을 느낀 부분이 있다.
싱가포르에 살면 좋은 점 - 편의성 편에서 밝힌 바와 같이 슈퍼마켓에서는 비닐봉투를 아낌없이 제공하고 어딜 가나 에어컨을 강하게 틀어 놓는다. 대부분의 가정에서 쓰레기 종량제는 커녕 분리수거라는 개념 조차 찾아보기 힘들다. 마트에 갈때면 에코백을 들고, 쓰레기를 철저히 분리수거하는 대한민국에서 살다 온 나에게 싱가포르 스타일은 조금 어색하게 다가왔다. 분명히 몸은 편했지만, 같은 지구에 사는 다른 누군가는 피해를 보지 않을까 하는 내적 갈등이 몰려왔다. 이들에게 '환경오염'은 어떤 의미일까? 만약 자연보호를 중시하는 생태주의자라면 이 사회에서 불편함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트럭 화물칸에 예닐곱 명의 젊은 남자가 다닥다닥 붙어 앉아 이동한다. 공사 현장에는 젊은 인부들이 땀을 흘리며 일을 하고 있다. 그들은 패트 병을 들고 다니면서 벌컥 벌컥 물을 마신다. 이것이 더위를 달래는 그들의 방식인 것 같다. 싱가포르는 아시아 금융의 허브, 글로벌 회사의 아시아 헤드쿼터가 위치한 고급스런 국가로 알려져 있지만, 동시에 낮은 급여를 받으며 몸이 힘든 일을 도맡아 하는 이들도 주변에 많다. 스리랑카, 미얀마 등 소득이 낮은 주변 국가에서 돈을 벌기 위해 싱가포르에 온 외국인 노동자들 덕분에, 물가가 높은 싱가포르에서 각종 서비스를 낮은 금액에 제공받을 수 있다. 청소부나 베이비시터의 인건비가 워낙 저렴하다 보니 각각의 가정에서 이들을 고용하는 것이 너무 자연스럽다. 이는 싱가포르 특유의 '편의성'에 일조하는 좋은 점으로 볼 수도 있지만, 같은 공간에서 극심한 '빈부격차'를 마주할 때 느끼는 감정은 썩 좋지 않다. 이러한 '차이'가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사회 분위기를 보고 있노라면 가치관의 혼란스러움을 느낀다.
2020년 4월 20일 오후 12시, 싱가포르에서 하루에만 1,426명의 코로나 확진자 환자가 추가되었다는 기사를 접하였다. 그동안 잘 관리해왔던 싱가포르였지만 미얀마, 인도, 스리랑카 등에서 온 외국인 노동자들로부터 감염 사례가 급증했다고 한다. 이 기사에 따르면 이 외국인 노동자들은 한 방에서 10여명이 함께 생활하는 등 사회적 거리를 확보할 수 없고, 비누와 세제도 없어 샤워와 청소는 사치로 여겨지는 상황이라고 한다. 깨끗하고 화려해 보이기만 한 싱가포르의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모습이다.
싱가포르 국립 박물관(National Museum of Singapore)을 구경하러 간 적이 있다. 그때 마침 '식민지 역사(History of Colony)'를 주제로 한 특별 전시가 있었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식민지'라는 단어는 '일제시대'를 연상케 한다. 많은 사람들은 이 시기를 5천년 한반도 역사 중 가장 치욕스런 기간으로 여기고, 일본에 대해 (부정적인 의미로) 특별한 감정을 갖고 있는 국민들도 상당히 많을 것이다. 그런데 싱가포르 식민지 역사 전시는 상당히 흥미로웠다. 내가 잘못 파악할 것일 수도 있지만, 전시의 설명을 읽어보면 영국이나 일본의 식민지배에 대해 긍정적인 어조로 표현되어 있었다. 그들 덕분에 신식 문물을 접해 빠른 근대화를 이룰 수 있었다는 그런 내용 말이다. 오랜 기간 여러 국가로부터 식민지배를 받다보니 누군가의 지배를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그 중 상대적으로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국가를 미화하게 된 것일까? 어쨌든 한국인들과는 다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높은 GDP와 깨끗한 이미지 덕분에 많은 사람들은 싱가포르를 '선진국'으로 알고 있는데, 사실 싱가포르는 '독재국가'다. 싱가포르 첫번째 총리였던 '리콴유(Lee Kuan Yew)'는 싱가포르 총리로 26년간 재직하였고, 중간에 다른 이가 총리를 역임했으나 2004년 리콴유의 아들이 세번째 총리를 이어 받아 지금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다. 언론은 철저히 통제되고 정치적 다양성은 허용되지 않는 분위기다. 그렇지만, 부정부패가 없고 국가가 부강해진 덕분에 국민들은 불만을 갖지 않는 분위기다. 오히려 리콴유는 싱가포르가 가장 존경하고 사랑하는 인물로 뽑힌다.
개인적으로 식민지의 역사나, 싱가포르의 정치를 대하는 입장은 존중하고 싶다. 다만 이러한 부분의 영향인지, 매사에 '순응'하는 태도는 적응하기 어려운 면이 있었다. 직장 상사가 부당한 명령을 내릴 때 불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항하지 못하는 모습을 종종 목격하였다. 고용주(Employer)인 회사와 종업원(Employee) 사이의 관계는 이보다 강력한데, 근로기준법에 이러한 분위기가 투영되어 있다. 2015년 당시 싱가포르 노동법을 찾아 보았을 때 '최저임금'에 대한 기준은 찾을 수 없었다. 최저임금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위에서 언급한 '외국인 노동자의 낮은 임금'이 설명되었다. 이 외에도 최소 유급휴가 수는 1년 당 7일에 불과했고 (통상적으로 유급휴가는 최소 14일을 제공한다) 해고로부터 종업원을 보호할 수 있는 규정은 찾기 어려웠다. 실제로 내가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던 상황에 내 상사는 이렇게 말했다.
"너에게는 두 가지 선택권이 있어. 하나는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가 다른 사람을 고용하는 것이야."
싱가포르 거주 기간이 짧아 이 나라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지만, 종종 가치관의 차이로 인해 불편한 감정이 들기도 했다. 외국에서의 삶을 꿈꾼다면 문화나 가치관이 자신과 잘 맞는지 살펴보는 것도 중요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