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하는 단 하나

달랏

by 소율


기대한 건 딱 한 가지였다.

엄청나게 대단한 걸 원한 건 아니었다. 고로 당연히 의심하지 않았다. 또한, 충분히 누리리라 다짐했다. 그래서 이곳에 긴 시간을, 2주일이나 덜컥 잘라 놓았던 것이다. 나는 어쩌다 그리 어리석은 희망에 부풀었을까.


삼 일째다. 흐리다가 사이사이 부슬비가 온다. 비가 오다가 바람이 휘몰아친다. 그러다 갑자기 소나기처럼 쏟아진다. 우산을 써도 젖고 안 써도 젖는다. 첫날은 그러려니 했다. 어쩌다 비 오는 날도 있겠지. 두 번째 날도 저러려니 했다. 또 비가 오네? 하지만 곧 그치겠지. 세 번째 날마저 비가 오다니. 이러다 설마(!) 날마다 비 오는 건 아니겠지?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느낌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불안감이었다.


여행지에서 비를 만나는 게 뭐 대수냐고? 운 나쁘면 비도 오고 그러는 거라고? 딴 데는 몰라도 이곳 달랏에서는 그러면 안 된다. 여긴 단연코 ‘파란 하늘만 봐도’ 행복해지는 곳이라고, 아니 ‘파란 하늘 때문에’ 행복해지는 곳이라고 들었으니까. 내가 달랏에서 기대한 건 오직 하나, ‘파란 하늘’이었다. 때는 12월의 한가운데, 명명백백한 남부지방의 ‘건기’였다. 이즈음의 달랏은 높디높은 하늘과 새하얀 구름이 그림보다 아름다워야 할 시기다. 그런데 이런 배신이라니! 세계적인 이상기후는 달랏이라고 예외가 아니었던 게다. 나는 배속 깊이 실망했다. 결론부터 밝힌다면 2주일 중 절반이 넘게 흐리고 비 오는 날이 이어졌다.


어쩌다 구름이 걷히는 날이면 나는 다리가 저릿해지도록 미친 듯이 걸어 다녔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알처럼 언제 이 하늘이 사라질지 모르니까. 새벽엔 맑았다가 아침을 먹을 때쯤엔 흐려지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아침 쌀국수를 다 먹기까지 파란 하늘이 보이면 무조건 뛰쳐나갔다. 시내 중심부의 쑤언흐엉 호수를 거쳐 플라워 가든을 돌고 달랏 대학교 후문 근처를 서성이다가 링선사까지 걸어갔다. 맑아도 바람은 여전하다. 모자를 눌러쓰지 않으면 머리카락이 제멋대로 헝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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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워 가든에서 언덕길을 넘어 달랏 대학교 쪽으로 가던 중(사실 언덕을 걸어서 가는 이는 나 하나였다), 과일을 파는 젊은 부부를 만났다. 그들은 뜬금없이 언덕 꼭대기에 오토바이를 세우고 거대한 연두색 과일을 부려 놓았다. 두꺼운 껍질이 울퉁불퉁한 것이 얼핏 두리안처럼 생겼다. 넓적한 칼로 반을 떡 가르고 다시 껍질을 쳐내면 노란색 속살이 나온다. 잭프룻이다. 하지만 통행이 잦은 대로도 아니고 이런 데서 과연 팔릴까? 하는 염려는 쓸데없는 짓이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오토바이를 타고 지나가다가 멈추어서 과일을 샀다. 부부는 저울을 옆에 놓고 무게를 달아 돈을 받았다. 추측하건대 과일값이 여타 노점상보다 훨씬 저렴했으리라. 손님들은 서슴없이 과일을 사는 데 반해 정작 부부는 끊임없이 주변을 살폈다. 무슨 일이 생기면 얼른 도망치려는 사람들처럼 자꾸 눈치를 보았다.


그러니까 그들은 ‘노점상’도 아니고 ‘번개상’이라 해야 할까. 잠시 난전을 펼쳐 놓고 물건을 팔다가 단속이 들이닥치기 전에 얼른 빠지는 번개상. 확실하지는 않으나 느낌상 그럴 것 같았다. 그들이 들키지 않고 최대한 많이 팔 수 있기를 바라며 나도 한 봉지를 샀다. 잭프룻은 처음 먹어봤는데 달큼하고 쫀득쫀득한 맛이 은근히 중독성이 있었다. 덜렁덜렁 오른손에 하얀 비닐봉지를 끼우고 걷다 서다 먹다 사진 찍다, 그렇게 걷는 길. 그게 뭐라고 실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달랏 시내의 작은 절, 링선사. 알록알록한 타일로 장식한 지붕과 탑이 돋보였다. 나는 그것이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벤치에 홀로 앉았다. 위로는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이 펼쳐졌다. 애니메이션의 화면처럼 채도와 명도가 지나치게 선명해서 비현실적이었다. 내내 신선한 바람이 불었다. 그리고 이따금 새소리. 그러나 또한 고요. 나는 실눈을 뜨고 하늘을 향해 꿈꾸듯이 숨을 들이켰다. 이 분위기. 이 날씨. 이 느낌. 이제야 ‘내 여행’을 하는 기분이 든다. 바로 이런 순간. 내가 달랏에서 그토록 바라왔던 순간이다. 내 안에 깊고도 찰랑찰랑한 무엇이 가득 찼다. 그걸 뭐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나는 이런 순간을 느끼기 위해 기꺼이 집을 나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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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지지 않았다. 아직은 푸른 하늘이 건재하다. 나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링선사를 나오는 길, 한 사내가 서 있었다. 군데군데 희끗한 머리카락에 회색 잠바를 입은 그는 지극히 평범해 보였다. 하지만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건 뒷모습 때문이었다. 그는 불당 아래 계단에 서서 두 손을 모으고 만트라 같은 말을 되뇌었다. “다모아리라보, 다모아리라보, 다모아리라보…….” 무슨 뜻일까. 그 소리와 뒷모습에는 간절함이 한껏 배어있었다. 불당 안에 들어가서 해도 되려만. 너무도 황송하여 안에서는 기도할 수 없다는 듯 밖에서 부처님을 향해 절을 되풀이한다. 무슨 사연일까. 나는 한참이나 그의 만트라를 들었다. 그의 간절함에 나도 젖어 드는 것 같았다. “다모아리라보, 다모아리라보, 다모아리라보…….” 당신의 소원이 무엇이든 반드시 이루어지기를. 지나가는 여행자가 당신을 위해 빌었다는 걸 그는 결코 몰랐겠지만.


원하는 단 하나는 쉽사리 이루어지지 않았다. 뻔뻔하게도 내 여행에게 요구했던 건 매우 어려운 일에 속했다. 당연히 주어지리라 생각했던 게 아주 귀한 것임을 깨달았을 때, 가끔 희망이 현실이 되는 날이 오면 나는 모자를 눌러 쓰고 밖으로 달려나갔다. 한 줄기의 바람도 한 움큼의 햇살도 놓치지 않으려고 온몸을 활짝 열어놓고서. 눈에 넘칠 만큼 온종일 파란 하늘을 담아 놓았다. 기억해야지, 잊지 말아야지. 내 안에 고이 쟁여두었다가 부푼 희망이 펑 소리 내며 가라앉을 때마다 꺼내 보아야지. 고운 상자에 숨겨놓는 반짝이는 보석인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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