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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율 Mar 29. 2023

제주 일년살이 최대의 실수

마음에 드는 집, 여유로운 시간, 외로움을 나눌 동지

제주도에서 일 년을 살았다고 하면 다들 궁금해한다. 얼마나 행복했는지, 얼마나 즐거웠는지. 이야기를 들려 달라고 하면 나는 오래된 유행어 '대략 난감'이 떠오른다. 한 마디로 '단쓴단쓴'인데 설명하기가 애매하다. 무엇이 쓰고 무엇이 달았는지 왜 그렇게 느꼈는지. 너무 긴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작년 12월이 제주 집의 계약 만료였다. 나는 한 달을 당겨 돌아왔다. 매서운 제주의 겨울을 두 번 겪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럼 열두 달을 못 채웠냐 하면 그건 아니다. 구좌읍 행원리 집을 얻기 전 애월읍 수산리에서 보름 동안 지냈으므로 대충 일 년이 맞다.


제주살이를 하자면 가장 중요한 건 첫째도 둘째도 '마음에 드는 집'을 구하는 것이다. 즉 자신의 목적과 취향에 맞는 집. 나의 최대 실수는 연셋집을 알아볼 때 성급하게 결정해 버린 점이었다. 방 두 개짜리 집을 얻는 일이 어렵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가능한 많은 집을 보고 그중에서 내 기준에 적합한 걸 고르면 되겠지. 생의 대부분의 일들이 그러하듯 계획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집을 얻기 위해 수산리의 원룸에서 보름을 지냈다. 그동안 충분히 집을 구할 수 있을 줄 알았다. 웬걸, 매물 자체가 없었다. 하루에 한 집을 볼 수 있으면 다행이었다. 코로나 초기에 다들 바싹 움츠렸다가 백신을 2차까지 맞고 한창 제주도로 몰려드는 시기였던 것이다. 나 역시 그들 중 하나였고. '공급보다 수요가 넘친다.' 단순한 이치였다.


내가 원한 조건은 다음과 같다. 풀옵션(살림을 일일이 구비하기란 너무나 번거롭다), 방 2개(가족이나 친구가 놀러 와 따로 잘 방 하나는 필수), 시끄러운 도로변에서 벗어난 곳(소음에 민감함), 편의시설로부터 멀지 않을 것, 그렇다고 시골 마을 한가운데는 아닐 것, 복잡한 제주 시내 제외, 주변이 녹지일 것, 해변보다 중산간 쪽일 것.   


꿈은 원대했으나 조건을 충족시키기엔 애초에 글러먹었다. 당최 볼 집이 없었으니. 게다가 나는 예비 제주도민으로서 자세가 전혀 확립되지 않았다. 여전히 여행자의 시각에 갇혀 있었다. '얼른 집을 구하고 나머지 시간엔 곶자왈과 숲길을 걸어야겠다.' 안일하고 방자했다. 어떡하든 좋은 집을 찾으려고 애를 써도 될까 말까인데,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한심했다. 실제로 나는 네 번째로 본 집을 계약하고 나머지 기간엔 룰루랄라 걷기를 즐겼다.


그때 철저히 집 구하는 데에만 집중했어야 옳았다. 최대한 나의 기준에 맞추되, 지켜야 할 조건과 버려야 할 조건을 구분했어야 했다. 원룸은 죽어도 싫었으니 방 두 개는 포기하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원하는 만큼 조용하지 않았어도 편의시설을 적극적으로 고려했어야 했다. 일 년이란 시간은 여행이 아니라 생활이니까. 습기를 지독히 싫어하는 나로선 역시 바다 쪽은 거부했을 확률이 높았다.


아마 보름 동안 열심히 돌아다녔어도 마음에 드는 집을 발견하지 못했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일단 중단하고 2월에 다시 가서 알아봤어도 괜찮았을 것이다. (남쪽 서귀포 부근을 제외한) 제주도의 겨울은 상당히 혹독해 따스한 춘삼월에 들어가는 게 훨씬 나았다. 나에게 맞는 집을 찾는다는 건 수요와 공급의 법칙 외에도 운과 인연의 법칙이 작동해야 하지 않았을까 싶다. 집이 나에게 오길 기다리는 것도 나쁘지 않았을 텐데.  


예상외로 공급이 달리는 바람에 나는 심하게 겁을 먹었다. 하루라도 빨리 집을 정하지 않으면 그나마 있는 집이나마 다 놓칠 것 같았다. 당장 집을 구하지 못하면 제주살이를 포기할 것만 같았다. 성마른 조바심이 나를 잠식했다. 누군가와 함께 집을 보러 다녔다면 패닉에 빠지지 않았으려나? 혼자서는 잘못된 판단을 내릴 수 있다는 걸 나중에 깨달았다.




그 결과는, 편의점조차 멀고 공항까지 한 시간이나 걸리는 낡은 타운하우스였다. (어렵게 본 네 개의 집 중엔 가장 괜찮았다) 하필 집주인마저 꽝을 뽑았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이사하는 날부터 고생길이 펼쳐졌다. 비 오는 겨울밤, 작동하지 않는 보일러와 곰팡이로 뒤덮인 방이 나를 맞이했다. 이후로도 툭하면 고장 나는 전자제품 때문에 내내 애를 먹었다.  


나보다 몇 해 먼저 제주살이를 시작한 선배. 그녀는 (운 좋게도) 하루에 열 곳쯤 되는 집들을 둘러볼 수 있었단다. 섬의 동서남북을 누비며 수많은 집을 보았다고 한다. 수요보다 공급이 넘치던 시기였다. 또한 그녀에겐 같이 따라다니며 조언을 해준 친구들이 있었다. 마음에 딱 드는 집을 찾아 지금껏 잘 살고 있다. 제주살이를 만족시키는 최대의 여건은 바로 집, 완벽한 혹은 완벽에 가까운 집이다.


나 같은 사람, 즉 일을 그대로 유지하며 혼자서 몸만 옮기는 경우. 그들이 특히 유의해야 할 것은 일 년 살이가 일 년 여행이 아니라는 점이다. 여행자 말고 생활인과 직업인으로도 살아야 한다는 걸 간과했다. 물론 장소가 장소이니만큼 여행을 빼놓을 수 없지만 그게 메인이 아니란 말씀. 가족이나 친구는 육지에 있어 부지깽이 하나라도 들어줄 이가 없었다. 모든 일을 하나부터 열까지 홀로 감당하는 상황은 아, 심히 외롭고 힘들었다.


나는 제주살이를 하는 동안 <그래서, 베트남>과 <유방암 경험자입니다만> 두 권의 원고를 마무리했다. 모두 무사히 2022년에 출간되었다. 사이사이 온라인 글쓰기 모임도 진행했다. 어차피 책상에 앉아 컴퓨터로 하는 일이었다. 장소가 문제 되진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은 이랬다.


제주도에서 한여름과 한겨울을 포함한 거의 육 개월은 사실상 야외활동이 불가능하다. 겨우 날씨가 좋아져서 나가고 싶은데 마쳐야 하는 일이 발목을 붙든다. 기한 안에 끝내야 하므로 무작정 뛰쳐나갈 수가 없다. 반대로 일을 다 마쳤는데 이번엔 날씨가 엉망이다. 역시 나갈 수가 없다. 일 년이 굉장히 긴 것 같지만 차 떼고 포 떼면 남는 시간이 많지 않았다.  


게다가 본가나 출판사에 직접 가야 할 일이 종종 생겼다. 공항이 멀어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겪어보니 그렇더라. 여행을 위한 비행은 순수한 즐거움지만 생활을 위한 비행은 번거로움 그 자체였다. 제주 일년살이라는 환상 안에 숨겨진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자칭 베테랑 여행자라는 자신감이 오히려 제주살이에선 대책없는 자만심, 독이 되었다.      


제주도에서 단맛만 즐기고 싶다면 봄가을 즉 3, 4, 5월이나 9, 10, 11월 중 한달살이를 추천한다. 한달살이 집은 물량이 많아 구하기도 훨씬 쉽다. 설령 풀옵션 월세가 조금 비싸더라도 한 달 정도야 감당할 만하다. 굳이 섬 생활의 쓴맛 신맛 짠맛까지 보고 싶지 않은 게 솔직한 심리 아닐까.  


나와 달리 일 년 살이에 만족하는 사람들을 분석한 결과, 정년퇴직을 한 (사이좋은) 부부나 어린 자녀와 함께 온 가족이 많았다. 일 년에 절반이나 되는 변덕스러운 날씨에 굴하지 않고 함께할 사람이 있는 상황이 유리했다. 또는 부부 중 한 사람은 일을 하더라도 다른 한 사람은 곁에서 도와주는 경우, 혼자 왔지만 이미 제주에 친구들이 있는 경우도 이에 해당한다. 다시 말해 두 가지 조건이 필요했다. 여유로운 시간과 더불어 기쁨과 괴로움을 나눌 동지들.   


혼자 오겠다면 꼭 일 년이라는 기간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 두 달이던 세 달이던 제주에선 하던 일을 잠시 멈추길 추천한다. 그렇지 않으면 일도 여행도 휴식도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어정쩡해진다, 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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